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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지방문화재 33

강화 굴암돈대 (2021.07.15)

강화 굴암돈대 (2021.07.15) 조선시대에 강화도의 해안 방어를 위하여 축조한 보루.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9호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에 있다. 강화도의 해안선을 따라 있는 강화 53돈대 중 하나이다. 돈대는 주변보다 높고 평평한 곳을 뜻하는데, 강화도의 경우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그 위에 작은 요새를 만들었다. 강화도는 예부터 외적의 침투가 잦았고 개성·한양 등 중부 내륙지방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는데,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조선 숙종 때 강화도를 요새화하기 위해 6진(鎭), 7보(堡), 9포대(砲臺), 53보루(堡壘)를 축조하였다. 조정에서는 1679년(숙종 5)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에..

강화 망양돈대 (2021.07.15)

강화 망양돈대 (2021.07.15)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7호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강화도는 예부터 외적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에 개성, 한양 등의 중부 내륙지방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로 해안방어에 각별히 힘써 왔던 곳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 숙종은 이곳에 6진(鎭), 7보(堡), 9포대(砲臺), 53돈대(墩臺)를 축조하기도 하였다.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에게 강화도의 지형을 돌아보게 한 뒤 어영군(御營軍) 4,000명과 함경도·황해도·강원도에서 뽑은 승병(僧兵) 8,000을 동원해 49개의 돈대를 축조하도록 명하였다. 망양돈대도 이때 축조되었다. 망양돈대는 ..

강화 계룡돈대 (2021.07.15)

강화 계룡돈대 (2021.07.15)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에 있는 조선후기 화강암으로 축조된 장방형의 돈대. 성곽시설. 시도기념물. 내용 1995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강화 53돈대의 하나이다. 1679년(숙종 5)에 축조되었는데, ‘康熙十八年軍威禦營築造(강희18년군위어영축조)’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축조연대를 알 수 있다. 주위가 79보에 치첩(雉堞 : 성벽에서 돌출시켜서 쌓은 성벽, 그 위에 첩을 둘러침)이 33개이다. 화강암으로 축조된 장방형의 돈대로 북쪽만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3면은 파손되어 토성만이 남아 있다. 망월돈대(望月墩臺)와 더불어 영문(營門)의 관할하에 있었다. [溪龍墩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

강화 망월돈대 (2021.07.15)

강화 망월돈대 (2021.07.15)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이다. ​ ​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다. 강화도는 예부터 외적의 침입이 잦았고 개성, 한양 등 중부 내륙지방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로 해안방어에 각별히 힘써 왔던 곳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 숙종은 이곳에 6진(鎭), 7보(堡), 9포대(砲臺), 53돈대(墩臺)를 축조하였다. 1679년(숙종 5)에 병조판서였던 김석주(金錫胄)에게 강화도의 지형을 돌아보게 한 뒤 어영군 4,000명과 함경도·강원도·황해도에서 뽑은 승병(僧兵) 8,000명을 동원해 49개의 돈대를 축조하였다. 망월돈대도 이때 축조된 것이다. 망월돈대는 40~120cm의 돌을 가..

강화 무태돈대 (2021.07.15)

강화 무태돈대 (2021.07.15)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국방 유적.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 해안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해안선을 따라 축조한 강화 53돈대 중 하나로, 1679년(숙종 5)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어영군(御營軍) 2,000여 명과 경기·충청·전라 3도 승군(僧軍) 8,000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강화도의 돈대는 53개 중 49개가 병자호란 43년 후인 숙종 5년에 지었다. 조선시대 때, 성곽이나 변방(邊方) 요지에 세워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마련한 초소인 돈대(墩臺)는 주변보다 높은 평지에 쌓는데, 밖은 구..

강화 고려궁지 (2021.05.03)

강화 고려궁지 (2021.05.03)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고려시대 몽골 침입 당기에 사용하던 궁궐터. 사적. 개설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사용하던 궁궐터다. 역사적 변천 1232년(고종 19) 6월 강화에 궁궐을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현재 강화 고려궁지라고 부르는 곳이 정궁(正宮)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그러나 1270년(원종 11)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강화 고려궁은 정궁의 지위를 잃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 자리에 건물과 외규장각(外奎章閣) 등이 건립되었다. 내용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해인 1232년(고종 19) 6월에 창건되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2021.05.03)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2021.05.03)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탱자나무. 내용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4m, 지상부의 줄기둘레 1m인 노거수로서, 나이는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줄기는 밑에서부터 두 개로 갈라져 있으며, 가지의 길이는 동쪽 1.5m, 서쪽 4.4m, 남쪽 3.3m, 북쪽 2.2m이다. 강화도는 고려 고종이 몽고의 침공을 피하여 천도한 곳으로, 조선시대 인조도 정묘호란 때 가족과 함께 난을 피한 장소이다. 그 뒤 이를 계기로 성을 튼튼히 하고자 성 밖에는 탱자나무를 울타리로 심어서 적병이 쉽사리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탱자나무를 심을 종자를 보내주고 그 생육상태를 보고받아서 이 나무의 이용지역을 조사하였다고 하는데, 이곳..

강화 갑곶돈. 강화전쟁박물관 (2021.05.03)

강화 갑곶돈. 강화전쟁박물관 (2021.05.03)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조선후기 갑곶나루에 설치한 돈대. 성곽시설. 사적. 내용 강화도 해안에 설치된 53돈대(墩臺) 가운데 하나이다.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선 정부는 강화도 방어책의 하나로 12진보(鎭堡)를 설치하였고, 그 뒤 진보와 진보 사이에도 여러 곳의 돈대를 쌓았다. 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어영군(御營軍) 3,000인과 함경·황해·강원 등 3도 승군(僧軍) 8,000인을 동원하여 40일 만에 축조하였다. 갑곶돈은 통진(通津)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갑곶나루에 설치하였는데, 돈대 주위가 113보(步)였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성가퀴인 치첩(雉堞)은 40개였다고 한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

강화 광성보 (2021.05.03)

강화 광성보 (2021.05.03)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후기 신미양요와 관련된 성곽. 진보. 사적. 내용 강화 12진보(鎭堡) 가운데 하나이다.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의 돈대(墩臺)와 함께 오두정 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 21)에는 돌로 성벽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두어 ‘안해루(按海樓)’라고 하였다.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곧 이 해에 미국 함대가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광성·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하여 물리쳤다. 하지만 4월 23일에 초지진은 미국..

강화 덕진진 (2021.05.03)

강화 덕진진 (2021.05.03)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덕진포대가 주둔한 진(鎭). 군사행정구역. 사적. 내용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197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5,018㎡. 현재 문루(門樓)·포대(砲臺)와 성곽·돈대(墩臺)가 남아 있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의 방비책을 강구하여 내성(內城)·외성(外城)·진보·돈대 등을 축조하였는데 12진보는 그 중의 하나로 강화도 주위에 설치되었다. 덕진진은 원래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의 계청(啓請)으로 첨사를 통진(通津)땅 덕포(德浦)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別將)을 두었으며, 1677년(숙종 3) 유수 허질(許秩)의 계청에 따라 만호(萬戶)로 승격시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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