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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지방문화재 33

분오리돈대 (2020.08.17)

분오리돈대 (2020.08.17)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조선후기 강화유수 윤이제가 축조한 돈대. 성곽시설. 시도유형문화재. 개설 강화도는 삼국시대 이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도 17세기∼18세기에 해안을 따라 6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9개의 포대(砲臺)와 함께 53개 돈대가 설치되었다. 이 돈대는 강화도의 가장 남쪽에 있는 돈대이다. 역사적 변천 돈대는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접경 지역이나 해안 지역 등의 군사 요충지에 세운 초소이다. 이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 1628∼1701)가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 1634∼1684)의 명령을 받아 경상도 군위의 어영군 8천 여명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전한다. 강화..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2020.08.17)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2020.08.17)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탱자나무. 내용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3.8m, 뿌리 근처의 지름 53㎝인 노거수로서 나이는 400년으로 추정하나 확실하지 않다. 가지는 동쪽으로 4m, 남쪽으로 2.7m, 북쪽으로 3.9m 정도 퍼져 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막아주지 못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몇 차례 외과수술을 하였다. 썩은 부분을 완전히 제거하고 쇠약해진 곳을 보강하였으나 수관(樹冠: 나무의 줄기 위에 있어 많은 가지가 달려 있는 부분)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서 서쪽 가지는 완전히 죽고 동쪽가지는 지주로써 지탱하고 있다. 뿌리 근처에서 돋아난 맹아(萌芽: 식물의 새로 트는 싹)가 자라기 시작하여 다시 곧..

이건창 생가 (2020.08.17)

이건창 생가 (2020.08.17)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개항기 문신·학자 이건창의 생가. 시도기념물. 내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0호.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기둥이나 보 등의 치목수법(治木手法)으로 볼 때 1백여 년이 된 것으로 판단되며, 자연석(自然石) 기단(基壇)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삼량(三樑) 가구로 몸 전체를 짠 전형적인 한옥(韓屋)의 구조로 되었다. 안채는 ㄱ자형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너방이 좌우에 있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내는 등 경기도 지방의 일반적인 살림집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이 건물 바로 옆에는 조부(祖父) 이시원(李是遠)의 묘소가 있다. [李建昌生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 명미당 현판 측백나무(수령 350년) 측백나무(수령 350년)

강화도 삼암돈대 (2020.08.17)

강화도 삼암돈대 (2020.08.17)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에 있는 조선후기 강화유수 윤이제가 축조한 돈대. 성곽시설. 시도유형문화재. 개설 강화도는 삼국시대 이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도 17세기∼18세기에 해안을 따라 6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9개의 포대(砲臺)와 함께 53개 돈대가 설치되었다. 이 돈대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적 변천 돈대는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접경 지역이나 해안 지역 등의 군사 요충지에 세운 초소이다. 이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 1628∼1701)가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 1634∼1684)의 명령을 받아 경상도 군위의 어영군 8천 여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건평돈대(乾坪墩臺), 망..

강화 부근리 지석묘(강화 고인돌) (2020.07.15)

강화 부근리 지석묘(강화 고인돌) (2020.07.15)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화강암으로 된 북방식 고인돌. 지석묘. 사적. 내용 1964년 7월 11일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 가운데 대형에 속하는 것으로, 지상에서의 높이 2.6m,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7.1m, 너비 5.5m이며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부근리 고인돌은 모두 10기(基)로, 비지정인 128번 고인돌을 제외한 9기가 세계유산에 포함되어 있다. 대촌부락 마을회관 앞에 자리하며 미군부대 전입 등으로 현재 4기만 남아 있다. 받침돌[支石]은 두개의 긴 굄돌만 있는데 방향은 대략 남북이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표면조사가 이루어졌을 뿐 아직 학술적인 발굴조사는 행해지지 않은 ..

강화산성 북문 (2020.04.24)

강화산성 북문 (2020.04.24) 이 북문은 고려 고종 19년(1232)에 강화로 천도한 뒤 대몽 항쟁을 위하여 축조한 내성(당시 토성)에 연결되었던 문이다. 내성은 개경환도와 동시에 헐리고 조선 초기에 토성으로 개축하였으나,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때 대부분이 파괴되었던 것을 효종 3년(1652)에 일부를 개축하였다. 숙종 3년(1677)에 유수 허질이 전면을 돌로 쌓고 후면은 흙으로 개축 확장하기 시작하여 숙종 37년(1711)에 유수 민진원이 34년만에 완성하였는데 주위가 1,947m, 치첩이 1,813개소이며 4대문과 4소문, 2개의 수문, 9개의 성곽, 4개의 성문장청이 있었다. 당시 북문은 누각이 없었으나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 일컬었으며, 동..

용흥궁 (2020.04.24)

용흥궁 (2020.04.24)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조선후기 제25대 철종과 강화유수 출신 정기세 관련 주택. 시도유형문화재. 내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다. 원래는 민가였던 모양이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1853년(철종 4)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 1903년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 1동 등이 있다.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조형되어 질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의 구조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건..

김상용 순절비 (2020.04.24)

김상용 순절비 (2020.04.24)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비이다. 선원 김상용(1561∼1637) 선생은 선조 23년(1590) 문과에 급제하여 판동녕부사, 병조·예조·이조의 판서, 유도대장,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를 모시고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란했으나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른 후 순절하였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으며, 선원면에 자리한 충렬사에 그의 위패를 모시었다.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하나는 정조 때 공의 7대손인 김매순이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숙종 26년(1700) 선생의 종증손 김창집이 건립한 것으로, 1976년 지금의 자리..

강화 심도직물 터 (2020.04.24)

강화 심도직물 터 (2020.04.24) 1947년 김재소 씨가 세운 심도직물 한창 때 심도직물 종업원 수가 1,500명이 넘었으며 강화도 인구 중 1만명이 심도직물 직원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후 강화도 직물산업은 대구 섬유산업의 번창으로 사양길에 접어들었으며 현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와중에 굴뚝이나마 보존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강화산성 동문 (2020.04.24)

강화산성 동문 (2020.04.24)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후기 몽골 침입 당시에 축조된 성곽. 산성. 사적. 개설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산성으로,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다. 역사적 변천 1232년(고종 19) 6월 몽골군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강화산성의 경우 1234년(고종 21)부터 본격적으로 축조하였다. 약 1.2㎞ 규모로 토성(土城)을 축조하였는데,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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