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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지방문화재 97

울진 월송정 (2023.02.21)

울진 월송정 (2023.02.21)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는 고려시대 정자. 위치 월송정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송림에 자리 잡고 있다. 영동고속도로 강릉분기점에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동해시에 이르면 국도 7호선과 만난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국도 7호선을 타고 달려 동해시를 벗어나 삼척시를 지나면 울진으로 접어든다. 국도 7호선을 타고 울진을 벗어나 영덕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도로 건너편에 월송정 입구가 있다. 변천 1326년(충숙왕 13) 존무사(存撫使) 박숙(朴淑)이 처음으로 지었다. 충선왕 때 안축(安軸)의 기문에 “정자를 여기에 지으면 그 운치가 한송(寒松)·월송(越松)의 두 정자와 서로 갑을이 될 것이다”라고 한 기록이 있으며, 1349년(충정왕 1) 이곡(李穀)이 쓴..

문원공회재이언적신도비 (2022.12.12)

문원공회재이언적신도비 (2022.12.12) 정의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이언적(李彦迪)의 신도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67-2호 내용 조선 중기의 문신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을 기리기 위하여 1586년(선조 19)에 건립한 신도비이다. 비석은 1577년(선조 10)에 세운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소재한 이언적 신도비와 함께 200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의 전체 높이는 300㎝, 비신은 180㎝이며, 비문의 글씨는 손엽(孫曄, 1544~1600)이 지었다. 신도비명은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지었다. 참고로 옥산서원의 신도비의 글씨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썼다. 신도비 인근에는 이언적의 신위를 모신 달전..

포항 달전재사 (2022.12.12)

포항 달전재사 (2022.12.12) 포항 달전재사 浦項 達田齋舍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43호 포항 달전재사는 승려들이 거주하였다고 전해지는 건물이다. 현재는 조선시대 초기 동방 5현(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한 사람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의 묘소를 관리하고, 묘소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재실로 쓰고 있다. 재사에서 서쪽으로 약 70m 떨어진 언덕에는 이언적 부부를 비롯한 부모, 동생 등 일가의 묘소가 있다. 이언적은 24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 밀양부사를 거쳐 중종 25년(1530)에 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김안로 등용에 반대하며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김안로가 물러난 뒤에 복직하여 홍문관교리, 직제학을..

청송 송정 고택 (2022.10.19)

청송 송정 고택 (2022.10.19)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건립된 일제강점기의 주거 건축. 개설 덕천리에 있는 청송 송정고택은 1914년에 건립된 심상광(沈相光)[1886~1964]의 살림집이다. 심상광의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순화(純華), 호는 송정(松庭)으로 심부자라 불리는 만석꾼 심호택(沈琥澤)[1862~1930]의 둘째 아들이다.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위치 파천면사무소에서 국도31호선을 타고 남쪽으로 2.2㎞ 가량 가면 파천초등학교 방면으로 작은 도로가 나온다. 다시 이 도로를 따라 덕천교를 건너 남쪽으로 1.3㎞ 가면 우측에 소슬교가 나타나는데, 소슬교를 건너면 바로 덕천마을이다. 소슬교 건너 135m 가량 직진한 후, 좌측 방향으로 50m 가량 이동하면 송소 고택(..

청송 송소 고택 (2022.10.19)

청송 송소 고택 (2022.10.19)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에 있는 개항기 만석 재산가 심처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 관련 주택. 국가민속문화재. 개설 2007년 국가민속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영조 때 만석의 재산을 가졌던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심호택(沈琥澤)이 1880년경 파천면 지경리(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이거하면서 건축한 가옥으로, ‘송소세장(松韶世莊)’이란 현판을 달고 9대간 만석의 부를 지녔던 주택이다. 10채의 건물이 경내에 있는데 그 중 측간(안채·사랑채)과 대문간채는 개화기 이후의 건물이다. 그 외의 건물에도 중수시 1912년 이래의 개화형 흔적이 보여 1880년대 건축구조가 온당하게 보존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내용 대문간채는 정면 ..

청송 운봉관 (2022.10.19)

청송 운봉관 (2022.10.19)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에 있는 조선전기 청송군수 하담이 건립한 관청. 객사. 시도유형문화재. 내용 정면 6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건물. 1990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청송군 객사의 일부로, 1428년(세종 10)에 군수 하담(河澹)이 찬경루(讚慶樓)와 함께 건축한 것으로 1600년대, 1717년(숙종 43), 1812년(순조 12)에 각각 중건되었고, 1871년(고종 8)에 부사 윤현기(尹顯岐)가 중수한 바 있다. 용전천의 북안 암반 위에 남향하여 찬경루가 있고, 그 바로 후방에 운봉관이 서남향으로 앉아 있다. 잡석을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기둥은 대체로 좌측 반은 각주를, 우측 반은 원주를 사용하였다. 정면과 우측..

영양 현동 당간지주 (2022.10.19)

영양 현동 당간지주 (2022.10.19)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현리에 있는 당간지주.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5호로 지정되었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영양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 가운데 서쪽의 지주가 무너지고 동쪽 지주 일석(一石)만 남아 있다. 이 당간이 있던 절 이름과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높이는 2.1m이다. 당간은 당(幢)을 달아 두는 장대이고, 지주는 장대를 지탱하도록 하기 위해 당간의 좌우에 세워 둔 기둥이다. 대개의 당간지주에 둥근 구멍이 있는 것은 그것을 이용하여 장대를 묶기 위한 것이다. 사찰에서의 당은 사찰 입구에 꽂은 기당(旗幢)의 일종으로서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당간에 달게 된다...

안동 전주류씨 무실종택 (2022.09.22)

안동 전주류씨 무실종택 (2022.09.22)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에 있는 조선시대 전주유씨 관련 주택.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7호. 내용 1984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주유씨 무실 대종택인데, 무실의 입향조(入鄕祖)는 전주유씨의 시조 완산백(完山伯) 유습(柳濕)의 6대손인 유성(柳城)이다. 무실문중은 퇴계학통으로 학문적 기틀을 마련하고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7대손 기봉(岐峯)유복기(柳復起)과 문규(門規)를 제정한 8대손 도헌(陶軒)유우잠(柳友潛)이 그 기반을 확립하였으며, 그 후 월회당(月會堂)유원형(柳元鉉)이 문중의 화목과 학문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정침(正寢 : 집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집 또는 방)은 정면 7칸, 측면 6칸 규모의 口자형 주택인데 사랑채가 오른..

안동 수애당 (2022.09.22)

안동 수애당 (2022.09.22)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가옥. 변천 수애당은 수애(水涯) 류진걸(柳震傑)이 1939년에 지은 집이다. 당호는 류진걸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임하댐 건설로 수몰 지구에 들어가자 198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형태 오른쪽 대문채를 들어서면 담장으로 구획된 장방형의 행랑 마당이 나타나고, 담장 사이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일자형의 정침과 ‘ㄱ’자형의 고방채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대문채의 왼쪽에는 외양간과 창고를 두었고, 오른쪽에는 통간 온돌방을 두었다. 고방채는 12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로 정침의 앞에 자리 잡고 있으며, 외벽은 담장 역할을 하고 있다. 평면은 정침 쪽에서 보았을 때, 왼쪽으로부터 창고 2칸, 고방 4칸..

안동 소산동 동야고택 (2022.09.22)

안동 소산동 동야고택 (2022.09.22)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통 가옥. 개설 안동 소산동 동야고택은 안동김씨 19세손인 김중안(金重安, 1639~1705)이 지었다고 하나 건축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이 집에서 태어나 수학하였다. 김양근의 본관은 안동으로,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만녕전별검(萬寧殿別檢), 전적(典籍), 병조낭관(兵曹郎官) 등을 지냈다. 1773년 시폐(時弊)를 논하는 소를 올려 문제가 되자,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지평(持平)에 복직되었다. 뒤에 현풍현감과 음죽현감을 역임하였고, 1799년 통정대부에 가자되어 형조참의를 지냈다. 문집으로 『동야집(東埜集)』 14권 6책이 있다. 김양근은 영조 때 증광문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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