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산행및여행/유럽여행사진(2004년)

프랑스 여행사진 3 (2004년)

산을 오르다. 2004. 11. 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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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여행사진 3 (2004년)

 

 

 

 

 

 

 

파리시내에서 베리사이유 궁전 가는 길의 센느강

 

 

파리-베르사이유 궁전 가는 길의 고속도로

 

 

파리-베르사이유 궁전 가는 길의 고속도로

 

 

베르사이유 궁전 가는 길의 가로수
일명 깍두기 조경

 

 

베르사이유 궁전 근처의 풍경

 

 

베르사이유 궁전의 개요

 

 

베르사이유 궁전 입장권

 

 

베르사이유 궁전의 모습
화려함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베르사이유는 당대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던 루이 14세가 자신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대궁전이다. 건축가 르보(Leveau)와 망사르(Mansart)가 설계하고, 인부 25천명과 말 3천마리가 동원되어 50년간의 긴 공사끝에 탄생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왕의 기호에 맞도록 꾸며진 호화로운 가발과 의상을 입은 신하들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들어서며
프랑스 파리 근교의 베르사이유 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근사하다. "짐의 말이 곧 법이다"라고 외치던 태양왕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50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엄청난 돈과 희생을 치르면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인 베르사이유 궁전이 탄생되었다.

 

 

베르사이유 궁전 앞의 모습

 

 

베르사이유 궁전 정면의 모습
꿈의 궁전이라 불리우는 아름다운 궁전은 결국 탄생되었지만 이 궁전 덕분에 나라의 재정은 황폐해지고 민심은 흉흉해져 결국 민중혁명이 세상을 뒤바뀌게 했다. 역사는 그렇게 변했지만 프랑스는 세계가 시샘하는 화려한 대건축물 베르사이유 궁전을 갖게 되었다.

 

 

베르사이유 궁전
사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궁전을 짓기 위한 터는 건축가들에게 악몽같은 곳이었다. 땅이 부드럽고 고운 모래여서 기초의 일부는 내려앉았다. 전국에서 끌어온 흙으로 늪지를 메꿔 기초를 다졌고 그 넓은 정원을 모두 메우기 위해 나무를 심기도 했다. 그뿐인가 정원의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거대한 펌프로 강물을 끌어올려야 했다.

 

 

루이 14세의 기마상
루이 14세의 극단적인 사치와 광기의 부산물인 베르사이유 궁전이 지어진 것은 1661년 루이 14세 때의 일이다. 본래 이곳은 루이 13세가 사냥할 때 머무르기 위해 소박한 숙소로 있던 공터였다. 아버지가 죽은 후 루이 14세는 프랑스 최고 건축가들에게 이곳 베르사이유에 왕실 가족의 거처로 사용할 화려한 궁전을 짓도록 명령한다.
물론 궁전 주변으로 무려 7천 6백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대지에 화려한 정원을 조성하도록 명했다. 서릿발 같은 왕명을 누가 거스르랴...
하루 3만명에 이르는 노동력이 동원되어 터가 다지고 돌을 깍기 시작했다.

 

 

베르사이유 궁전
마침내 오랜 심혈을 기울여 완성된 궁전은 완성되었고, 루이 14세는 대단히 만족했다. 그럴만도 했다. 온통 금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건물과 체계적이고 안정된 건물 배치, 그리고 실크와 돌과 아기자기한 나무조각으로 문양을 새겨 치장한 실내는 그 화려한 명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궁전의 정원은 장대한 인공미의 완성품이다. 각을 맞추어 반듯반듯하게 정돈한 프랑스식 화단하며 금도금 조각으로 장식한 분수의 현람함이며 끝간데 없이 뻗어 있는 단아한 길의 장대함은 프랑스 정원의 압권이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기마상
50년이나 계속된 공사기간동안 프랑스의 이름난 건축가와 화가, 조각가, 원예가, 공예가 그리고 수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밤낮없이 혹사 당했다. 광기 어린 루이 14세는 이 거대한 궁전에 신들린 사람처럼 몰두했고 전쟁이 없을 때는 직접 건설 현장에 나와 건축과 조경을 감독했다.

 

 

왕실의 예배당
루이 14세에서 15세를 거쳐 루이 16세가 등극하자 소심한 남편을 품어안은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시대가 열린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백 명의 귀족들이 모여 이곳에서 질탕한 파티를 벌였다. 루이 14세에게 있어 파티는 언제 반기를 들지 모르는 봉건 귀족의 진을 빼 놓기 위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마리 앙트와네트에게는 화려한 궁전에 어울리는 화려한 생활이었을 뿐이었다. 성은 크게 왕궁과 수많은 부속건물 대연회장 화려한 침실 거대한 정원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내부는 대리석과 돌 나무조각 벽화 실크 도금된 가구들이 즐비하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고전적 양식의 거대한 궁 입구를 지나면 베르사이유에서 가장 화려한 거울의 방이 나온다. 무려 17개의 거대한 거울로 이루어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방이다. 천장을 장식한 샹들리에의 현란함은 또 어떤가?
빛 좋은 날이면 거울과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난반사하는 빛의 향연이 압권이다. 70미터나 되는 이방에는 무도회때 천장의 프레스코화가 거울에 비쳐 한층 화려해 보이라고 거울을 달았다고 한다. 그 맞은 편으로는 커다란 창문이 나 있어 화사한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베르사이유 궁 내부의 천장화

 

 

궁전 내부의 샹들리에
궁전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17개의 대형 거울이 높다란 아치형의 창문과 마주보고 있는 거울의 방이다. 길이 70미터인 이방은 대형 샹들리에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또한 왕비들이 출산을 하였던 왕비의 침실, 루이 14세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아폴로의 방, 루이 14세 동상이 화려한 대리석 장식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비너스의 방, 2층에 있는 왕족이 사용할 수 있었던 코린트식의 기둥에 흰 대리석, 금도금된 바로크 벽화로 장식된 왕실의 예배당등이 볼 만하다.

 

 

거울의 방

 

 

거울의 방(샹들리에가 보임)

 

 

궁전 내부에서

 

 

궁전 내부에서

 

 

궁전 내부에서 본 정원의 모습

 

 

궁전 내부의 모습

 

 

궁전 내부에서 본 정원의 모습

 

 

궁전 내부의 모습

 

 

화려한 궁전의 모습

 

 

궁전 내부에서 본 정원의 모습

 

 

궁전 내부관람을 마치고

 

 

베르사이유 정원을 관람하기 위한 입장권을 별도로 구매해야 한다.

 

 

베르이사유(Versailles) 궁전의 정원
"태양의 왕"으로 불리우던 루이 14세가 세계적인 조경가 노트르(Andre Le Notre)의 계획으로 만들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은 대표적인 프랑스식의 평면기하학적 정원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내부의 "거울의 방"등 아름답게 장식된 실내도 볼 만하지만 외부의 정원도 빼놓지 않고 꼭 보아야 할 부분이다. 특히 궁전 내부를 관람하면서 창 밖의 풍경에 관심을 가지면 그 아름다운 모습에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된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원래 루이 13세가 1624년 사냥을 즐기기 위해 조그만 오두막집을 지으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루이 14세에 의해 1661년 부터 1710년에 걸쳐 진행된 대규모 공사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1682년부터 25년간은 루이 14세가 그의 주요 일상업무의 하나로 매일 정원과 궁전의 공사진행 과정을 스스로 감독했을 정도로 이 정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 공사를 위해 군대를 동원하기도 하고 정부 총 예산의 10%정도가 공사비용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재무장관이었던 콜베르는 루이 14세에게 자제해 줄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공사 규모가 얼마나 큰지 한창 공사가 진행중일 때에는 36,000여명의 인부와 6000여필의 말이 공사에 동원되었다.

 

 

베르사이유 정원
궁전 뒤의 "물의 화단" 좌우로 펼쳐지는 남북의 축은 남쪽의 스위스 호수와 바로 옆의 오렌지원(Orangerie)이 있고 북쪽으로는 넵툰(Neptun)의 분수가 자리잡고 있다. 남북축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물의 화단"과 함께 그 좌우로 펼쳐져 있는 소위 자수화단이라고 불리우는 장식적인 화단(Parperre)이라고 할 수 있다. 넓은 대지위에 마치 꽃으로 수를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자수화단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는데, 프랑스 바로크 정원양식의 특징으로 여러 프랑스 정원과 이에 영향을 받은 주변 국가들의 바로크식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계절에 따라 다향한 색의 꽃과 기하학적인 형태로 다듬어진 상록수들이 잘 어울려져 환상의 세계를 연출해 주고 있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구성은 크게 동서와 남북의 두 개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의 축은 궁전의 중앙부분인 '거울의 방'이 있는 곳에서 시작되어 대운하 있는 곳까지 약 1㎞에 동서 고저차가 35m에 이르는 웅장한 조망을 가진 이 정원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사이유 정원
물의 정원이 있는 곳에서 앞으로 바라보면 대운하와 연결되어 "왕의 가로(Papis Vest)"를 중심축으로 총림이 좌우로 펼쳐지며 그 사이로 가로수길이 방사선 형태로 나 있는데 "태양의 왕"으로 불려지던 루이 14세를 받들기 위해서 태양광선과 같이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총림의 가로수길이 만나는 곳에는 조각이나 분수등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시선을 집중시킴과 동시에 총림은 평면기하학적인 단조로움을 해결시키기 위한 수직적인 요소로 악센트를 주고 있다.

 

 

 

 

베르사이유 정원
정원 끝의 대운하와 만나는 곳에는 아폴로의 분수가 자리잡고 있는데 해양신인 빈인반어의 트리톤(Triton)과 돌고래에 둘러 쌓여서 네 마리의 말이 끌고 가는 마차 위에 앉아 있는 아폴로의 모습이 매우 역동적인 형태로 궁전 쪽을 바라 보고 있다. 뒤로 보이는 대 운하는 길이가 1560m이고 수로의 넓이가 120m에 이른다. 운하는 십자로 교차되어 구성되어 있는데, 다른 한쪽인 남북축 운하의 길이도 1km에 이른다. 현재도 이 곳에서는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데 루이 14세 당시에도 이 곳에서 축제를 할 때 이 운하에서 뱃놀이를 하며 불꽃놀이와 함께 향연을 즐겼다고 한다.

 

 

베르사이유 정원
물의 화단으로부터 앞으로 계단을 내려가면 밤의 여신인 라토나(Latona)의 분수가 뒤에 총림과 대운하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분수 중앙부에는 라토나 여신상이 두 자녀 아폴로, 다이아나와 함께 운하쪽을 바라보며 서있다. 그 주위는 삼단으로 구성되어 개구리, 거북이, 그리고 개구리의 형태를 지닌 남녀 군상들이 원형으로 돌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분수 옆으로는 역시 자수 화단이 펼쳐져 있다. 라토나 분수 앞은 루이 14세가 정원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도록 한 장소. 분수 앞 펼쳐진 화려한 장관은 관람객의 발길을 한동안 떼지 못하게 한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모델이 된 보 르 비콩트(Vaux le Vocompte)성
베르사이유 궁전하면 루이 14세와 푸케(Nicolas Fouguet, 1615-1680) 또한 기억해야 한다.
푸케는 지금으로 따지면 재무부 국세청 장이었고 본인의 재력을 과시할 성을 짓는데 또한 여기에 그의 예술적인 자질이 추가된다. 1656년 르 브랭(Le Brun)은 실내장식을 맞고르 보(Le Vau)는 건축, 르 노트르(Le Notre)는 정원을 맡아 Veau(보)지역에 푸케의 부탁으로 보 르 비콩트 성을 짓기 시작했다. 재력 못지 않게, 예술분야에서도 놀라운 감각과 식견을 지니고 있던 니콜라 푸케, 그가 성을 짓기 위해 소집했던 예술가들은 건축가 르 보, 유화그림과 조각으로 실내장식을 도맡았던 르 브랭, 최고의 명성을 지닌 정원사, 르 노트르 등이었다.
5년 공사후 공사가 끝나고 1661년 8월17일 젊은 루이 14세(1638-1715)와 귀족들을 초대하여 향연을 벌였는데 이때 보 르 비콩트 정원에서는 음악에 맞추어 1200여 개의 분수대 물이 품어 오르고, 정원을 흐르는 운하에는 뱃놀이도 벌어진다. 배 위에서 장대를 가지고 상대를 물 속에 빠트리게 하는 놀이, 뽑은 번호 모두가 당첨되는 복권놀이 등의 오락을 비롯, 화려한 무도회도 펼쳐진다. 유흥의 절정은 물리에르와 그의 극단이 공연한 야회 극장. 이날 저녁, 몰리에르(Moli re, 1622-1673)는 프랑스 문학사에도 기록이 남을 "Les Fcheux"라는 코미디물을 처움으로 푸케의 성에서 선보인다.

 

 

베르사이유 정원
이 정원을 둘러 보게 되면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태양의 왕"이 지닌 영향력의 정도를 짐작하게 할 수 있다. 노트르의 조경가로서 그의 탁월한 재능과 업적에 찬사를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모델이 된 보 르 비콩트(Vaux le Vocompte)성
푸케가 루이 14세를 위해 마련한 "세기"의 향연, 그러나 만찬의 주인공이었던 루이 14세의 노여움을 사고 만다. 푸케의 성은 루이 14세가 보지 못했던 가장 아름다운 성이었으며, 게다가 자신의 궁전에서 벌이는 향연들보다 더 화려하고 훌륭한 축제를 펼쳐 보이는 것이 아닌가. 푸케의 저택에 시기심을 느낀 신하들은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루이 14세의 귓전에 대고 소곤대기 시작했다. "폐하의 궁전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도대체 세금을 얼마나 도둑질했길래 그런 집을 지을수 있을까요. 그리고 폐하의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자존심이 상한 루이 14세는 결국, 푸케를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리며, 이 때 왕의 생모인 안느 도트리쉬 왕비가 이를 만류하는데 그로부터 19일 후, 푸케는 루이 14세의 근위기(Mousquetaire) 3총사로 유명한 달타냥(d'Artagnan)에 의해 결국 체포되고 만다.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푸케는 추방령이 선고되고 루이 14세는 마음을 바꾸어 그를 감옥에 투옥케 한다. 푸케는 체포와 더불어 전 재산이 몰수 된다. 동시에 루이 14세는 보 르 비콩트 성을 탄생시킨 주역들, 르 브랭, 르 보, 르 노트르를 소환, 푸케의 성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궁전을 짓도록 명령한다. 그리하여 베르사이유 궁전은 탄생된다.

 

 

에티켓이란?
영어에서의 에티켓(etiquette)은 예절 예법, 동업자간의 불문율이란 뜻이며, 그 어원은 'Estiquier'(마무 말뚝에 붙인 출입 금지)라는 의미인데 이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보호하기 위해 궁전 주위의 화원에 말뚝을 박아 행동이 나쁜 사람이 화원에 들어가지 못하게 표시를 붙여 놓은 것이 그 어원이다.
그 후 단순히 '화원 출입금지'라는 뜻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의 화원'을 해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넓게 해석하여 '예절'이란 의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는 에티켓의 유래다.

 

 

베르사이유 궁전
프랑스 절대 왕조의 영화를 회상케 하는 궁전. 파리 남서부 18km 지점에 있다. 궁전, 정원, 숲속의 샘 등의 아름다움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1차 세계대전의 베르사이유 조약이 이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맺어지는 등 국제적 무대로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베르사이유 정원

에티켓의 유래
이러한 에티켓이 프랑스에서 정착된 것은 15세기부터이며 안느 도트리슈(Anne Dqutriche:루이 13세의 왕비)의 노력으로 궁정 에티켓을 더욱 발전시켰고 루이 14세(17세기)때 완전히 정비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루이 16세 때에는 엄격성이 해이해지고 또한 혁명으로 인해 일단 소멸되었으나 나폴레옹이 이것을 부활시켜 1830년 법령에 의해 현재에 이르는 공식 의전의 형식이 확정되었다.

 

 

베르사이유 정원

하이힐의 탄생이력
하이힐의 숨은 이야기는 16세기 유럽 오물로 범벅된 길을 피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거기서 시작하여 뒷굽을 계속 높여 특정 신체부위를 강조한 여성구두의 대명사 하이힐이 되었다.

 

 

베르사이유 정원

에티켓의 유래
한편 영국의 황실 및 1831년까지의 스페인 왕실에서는 옛날 그대로의 엄격한 관례가 준수되고 있었으나 이후 민주화의 진전으로 단순화되었다.
그후 19세기말의 부르조아 사교계의 '관례:USAGE 및 예의 범절:CIVILITE'이 오늘날의 프랑스 에티켓의 기초가 되었고 국제간의 외교의 '례'는 별도로 프로토콜(Protocole)이라는 용어로 정의해 놓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에티켓의 어의가 변천되어 일반인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예의범절로 자리잡게 되었다.

 

 

베르사이유 정원

하이힐의 탄생 유래
17세기 초까지 나막신은 남녀 공용으로 투박한 모양이었는데 여성들이 점차 뒷 굽만을 높여 신체의 특정 부위를 돋보이게 하는 소품으로 변화했다. 하이힐은 신게 되면 가슴은 튀어나오고 히프가 내밀어져 관능미가 강조된다. 이는 하이힐을 신으면 균형을 잡기 위해 몸을 뒤로 젖혀야 하기 때문이다.
무릎을 쉽게 굽힐 수 없게 만드는 하이힐은 아장아장 걷도록 만들어져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바심을 느끼게 한다. 신체 균형을 깨뜨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하이힐은 오래 신으면 발가락이 기형화 되고 무릎관절과 척추에 손상이 오는등 부작용이 있으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베르사이유 정원

하이힐의 탄생 유래
하이힐은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하나 쯤은 갖고 있을 만큼 꾸준한 사랑을 받는 소품이다.
그러나 하이힐의 탄생 이력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16~18세기 까지도 유럽에는 화장실의 개념이 없었다. 일반인들의 주택은 물론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 같이 왕과 귀족이 생활하는 곳에조차 화장실이 없어 귀부인도 궁전복도 후미진 곳이나 가로수 밑에서 볼일을 봐야 했다. 아직 도로가 포장되기 전이라 비라도 오면 구석구석에 있던 오물이 흘러나와 흙탕물과 범벅이 되기 일쑤였다. 따라서 당시 땅을 쓸고 다닐 만큼 긴 스커트를 입고 다녔던 여인들은 어떻게 하면 오물을 묻히지 않고 다닐 수 있을까에 골몰하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하이힐의 효시인 굽 높은 나막신이다.

 

 

베르사이유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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