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여행사진 1 (2004년)
약 3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대도시 로마! 로마 건설은 기원전 735년 로물루스가팔라띠노 언덕에 양치는 목동들과 함께 로마제국을 세웠다. 그 후 많은 황제들과교황들을 중심으로 가지각색으로 변화하며 로마가 세워졌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 과같이 로마에 모든 유적과 유적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로마 건국의 전설을 보면 로마의 건설자 로물루스는 쌍동이 형제 레무스와 같이 암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고 한다. 그 후의 역사속에서 로마인은 궁지에 몰리면 야수처럼 저항하는 습성이 있었던 것을 보면 암늑대의 이야기는 참으로 상징적이다.
로마는 7개의 언덕에 둘러싸인 영원한 도시이며 7개 언덕중에 캄피돌리오 언덕,아벤티노 언덕, 에스퀠리노 언덕, 퀴리날레 언덕, 비미나레 언덕으로 처음 집단이이주하게 되면서 테베레강의 왼쪽에 있는 일곱언덕이 로마의 중심 거주지가 되었다.
로마인의 도시건설은 우선 공공 광장을 만들고, 그 주위를 벽돌로 벽을 쌓고 교회당과 대하수도로 둘러싼다. 또한 로마 유적의 특징은 완벽한 복원이라든가 화려한 치장을 하지않고 시간의 흐름과 자연미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는 그 자체가 신화의 창조자이자 거대한 미술관이며, 하나의 제국이자 문명이자,이탈리아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이다. 콜롯세움과 포로로마노, 스페인계단과 트레비샘, 카라칼라 욕장과 카타콤베등은 여행자들에게는 모두 경이와 감격으로 다가온다.
로마는 이탈리아공화국의 수도. 인구 272만 명. 7개의 구릉을 중심 으로 발달한 도시로서,성벽으로 둘러싸인 고대로마 이래의 긴 역사를 가졌으므로 ‘영원의 도시’ 라 불린다. 이탈리아반도 중부의 티레니아해안에서 약 25㎞ 떨어져 있으며, 테베레강 양안에 걸쳐 위치한다.
로마 시내의 우산소나무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의 혜택을 받는 이 나라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관광도시이다. 시역(市域)내의 바티칸시국(市國)은 세계 그리스도교의 중심이다. 공업은 번성하지 못하나 인쇄.출판.필름.식품가공.섬유 등의 공업은발달하였다.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번영하였으나, 330년에는 콘스탄티노플로수도를 빼앗기기도 하였으며,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후에는 작은 지방도시로전락하기도 하였다.
중세에 로마교황의 권위가 높아짐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수도로서 지위가 확립되고, 교황이 행정을 맡았었다. 1798년 프랑스군의 압력으로 로마공화국이 성립하였으나 나폴레옹 몰락 후 교황의 지배가 부활하였다. 1871년 이탈리아왕국의 수도가 된 이후, 이탈리아정부와 교황과의 로마의 지배를 둘러싼 쟁의는 1929년 라테란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바티칸시국의 성립으로 끝났다. 콜로세움?카라칼라대욕장등의 유적과 산탄젤로성.산타마리아마조레성당.산피에트로대성당 등의 건축물과로마대학, 가톨릭계의 여러 대학, 보프게제미술관 등 교육.문화시설이 많으며, 교외의 티레니아해안에는 레오나르도다빈치 국제공항이 있다.
로마시내의 거리
로마의 한인식당 앞에서
로마 한인식당 앞의 꽃
로마 한인식당앞의 꽃
로마의 우산소나무
로마의 석양
바티칸 박물관 입구
바티칸의 산 피에트르 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내에 있는 미술관이다.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고문서·자료를 수장(收藏)하고,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장식으로 유명하다. 창설은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 때 벨베데레의 정원에 고대 조각이 전시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클레멘스 14세 치하인 1773년이다. 현재 본관은 피오 클레멘티노미술관·도서관·성(聖)유물관·회화관 등 많은 부분으로 나뉘고, 또 각실은 보르지아실(室)·라파엘로실·지도실이라는 특유의 명칭으로 불린다. 미켈란젤로나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성당·파오리나성당·니코로 5세 성당 등도 미술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바티칸 박물관
바티칸의 개요
위치 : 로마시
면적 : 0.44㎢
인구 : 1,000명(1996)
공용어 : 이탈리아어,라틴어
통화 : 바티칸리라(이탈리아리라등가)
환율 : 1,788리라=1달러(1998)
면적 0.44㎢. 인구 1,000명(1996). 영토는 엄밀하게 말하면 가톨릭의 총본산 바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구역만이다. 바티칸 시국의 국기는 동시에 교황기(旗)이다. 오늘날의 국기는 1825년, 레오 12세 때 제정된 황색·백색의 2색기로, 백색 부분 중앙에 금·은 2개의 열쇠가 교황관(冠)을 받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바티칸 박물관 안의 삐냐 정원(솔방울 정원)
정원 가운데 있는 지구는 병들어 가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삐냐 정원의 병들어 가는 지구의 모습
삐냐 정원(Cortile della Pigna, 솔방울 정원)
4m 높이의 거대한 청동솔방울은 고대 로마의 분수 일부였으며 한때는 성 베드로 성당의 안뜰에 있었다. 대부분은 브라만테가 설계했으나 솔방울자리는 1562년 피로리고리오가 만들었다.
솔방울은 교황청의 상징이 되고 있다
삐냐 정원에서
삐냐 정원에서
삐냐 정원에서
벨베데레의 뜰("8각형의 뜰", The Octagonal Court)
15세기 말 교황 인노센트 8세의 지시로 브라만테(Bramante)가 만든 벨베데레(Belvedere)궁의 8각형 안뜰이다. 이 뜰의 주위에 전시된 조각상들은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서양 예술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라오쿤(The Laocoon)
로마의 에스퀼레스 언덕 네로의 황금집 폐허에서 1506년 발견된 작품으로 작자는 로도스섬의 조각가 아게산드로스, 아테노도로스, 폴리도로스 등 3명이라고 전해지며, 제작연대는 기원전 150 ~ 기원전 50년 경으로 짐작된다. 트로이의 사제 라오쿤과 그의 아들들이 두뱀과 싸우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인간의 가장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라오쿤(The Laocoon)
신들의 저주로 물뱀에 물려 죽는 중앙의 라오쿤을 왼쪽의 차남은 외면하고 있고, 오른쪽의 장남은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 앞에는 한 장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이 사진 속의 라오쿤은 오른 팔을 하늘로 쭉 뻗고 있다. 이는 팔꿈치 부분의 조각이 발견되기 전에 상상으로 만들어 붙여 놓았다가 후에 팔꿈치 조각이 발견되어 오늘날과 같이 복원되었다.
벨베데레 정원의 조각상들
벨베데레 정원의 조각상들
라오쿤(The Laocoon)
이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올림푸스 신들이 무력한 인간들에게 행하는 무정하고 잔인한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라오쿤은 아폴로를 섬기는 트로이의 사제이다. 트로이전쟁때 그의 동포들에게 그리스 군인들이 숨어있는 목마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한다. 트로이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이 좌절되는 것을 본 신들의 노여움을 사,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보낸 두 마리의 큰 뱀에게 두 자식과 함께 졸려 죽었다.
벨베데레의 아폴로(The Belvedere Apollo)
기원전 320년에 제작된 그리스 아티카 출신의 한 작가가 만든 청동상을 대리석으로 모방한 작품으로 태양의 신 아폴로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다. 1503년 율리우스 2세가 이 조각상을 산 피에트로 근처에 있던 그의 궁에서 여기로 옮겨왔다.
벨베데레 정원에서
벨베데레의 아폴로
인체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고전양식의 걸작 중 하나로 왼손에는 아폴로 신의 상징인 활을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등에 맨 화살통에서 뽑은 신의 상징인 활을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아름다운 옷의 주름과 샌들의 정교한 세부 묘사가 정교하고, 남자이지만 여성의 몸매를 모델로 한 듯하다. 이 아폴로 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의 얼굴을 그릴 때 이 아폴로 상을 모델로 그려 넣었다고 한다.
코스탄자의 석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딸이었던 코스탄자의 석관으로 외부에 포도 수확 장면이 새겨져 있다.
바티칸 박물관의 긴 화랑-벽면 천장이 모두 회화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스도의 변용(變容)
르네상스 정점에 선 거장 라파엘로(Sanzio Raffaello-1483-1520)의 작품
베드로/야고보/요한 등 세제자를 거느리고 산에 올라간 예수의 모습이 변한다.그 양옆에는 승천했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그리스도와 이야기 하고 있는 장면을 잘 묘사하고 있는 명화.
최후의 심판
시스틴 성당의 총 226평방미터에 달하는 제단 벽면을 차지하는, 이 프로스코 작업은 원래 클레멘트 7세 시절에 계획되었으나 그의 후계자 바오로 3세 파르네세가 실제 작업을 명하였다. 당시 61세였던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중단한지 20년 만에 다시 복귀하였다. 1541년 10월 31일, 교황이 제막식을 거행했지만, 사실은 다 완성되지 않았다. 작업일수 450여 일을 보낸 뒤인 17월 18일에야 완성되었다. 작품 한복판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이 서 있고, 어떤 사람들은 천국으로 들림을 당하고 어떤 이들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 작가는 그 옆에다 성 바돌로매의 벗겨진 껍질의 모습으로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바티칸 박물관의 천장과 벽면
천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좌/우 벽면에는 지도의 방으로 꾸며져 있다.
바티칸 박물관에서 본 바티칸 라디오 방송국
1931년 개설된 바티칸 라디오 방송국이 현재 37개국어로 방송을 하고 있다. 텔레비젼 방송은 없다.
바티칸 박물관에서 본 바티칸 궁의 정원의 모습
바티칸 박물관에서 본 성 베드로 성당의 첨탑의 모습
바티칸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다시 입구로 나와서
로마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암늑대
10년에 걸친 트로이전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족의 일족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가 이끌고 탈출한 사람들뿐이다.
아이네이아스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로마식으로는 베너스:Venus)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데, 바로 어머니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를 떠나 지중해 일대를 표류하다가 로마 근처 해안에 이르러 그 곳 왕의 딸을 아내로 삼아 정착하게 된다. 그의 아들인 아스카니오스가 정착지를 떠나 새로운 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이를 알바롱가라고 명명한다. 이 도시가 바로 로마의 모체가 된 도시다.
그 뒤 알바롱가의 왕이 죽자 그 동생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조카인 공주를 무녀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무녀는 처녀로 지내야 하는데, 공주가 아들을 낳으면 자신이 찬탈한 왕위가 위험해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깐 강가에서 잠든 공주의 모습에 반한 군신 마르스가 공주의 꿈 속으로 내려와 사랑을 나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이다.
이 사실을 안 숙부는 쌍둥이를 바구니에 담아 테레베 강에 버렸는데 이를 늑대가 발견하고 젖을 물린다. 늑대의 젖을 먹고 굶주림에서 벗어난 쌍둥이 형제를 양치기가 데려가 길렀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성정하여 그 일대 양치기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을 자신들의 출생에 얽히 비밀을 알게 되자 알바롱가로 쳐들어가 숙부인 왕을 죽였다. 어머니는 이미 옥중에서 죽은 뒤였다. 그 후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테레베강 하류에 도시를 세우기로 하고, 이를 분할 통치하였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을 자신의 근거지로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레무스가 그 약속을 어기고 두 세력권의 경계를 나타내는 도랑을 침범하였다. 이것은 남의 권리에 대한 침해 행위였고, 법률문화를 꽃피운 로마인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였다. 로물루스는 국정을 왕, 원로원, 민회의 3기관으로 나누고 민회의 투표로 왕이 된다. 이 때 그의 나이는 18세였다.
로물루스의 이름을 딴 로마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로마가 탄생하기 까지는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를 탈출한 뒤 4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울 당시 그의 세력은 대부분 양치기와 농민으로서 독신남자가 주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로물루스가 가장 먼저 추진한 국책사업은 로마시민들 결혼시키기였다.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웃 사비니족에서 여인을 강탈하였다.
이것을 기화로 사비니족과 4차례에 걸친 싸움을 치렀는데, 대부분 로마의 우세로 끝났고, 로마인 남편으로부터 아내로서의 대접을 받고 지내면서 정을 느끼게 된 사비니족 여인들은 남편들과 과 친정 아버지, 오빠들과의 전쟁을 보지 못해 전쟁 중지를 호소하여 화평을 맺고 사비니족은 로물루스 세력과 합치게 된다.
이 때부터 생긴 결혼풍습이 바로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로마는 시작되었다.....
로마시내를 흐르는 테베레 강
이탈리아 중부의 강. 길이 405㎞. 유역면적 1만 7769㎢. 옛 이름은 티베리스강, 영어이름은 타이버강이다. 이탈리아에서 포강·아디제강 다음가는 긴 강이다. 아펜니노산맥의 푸마이올로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토스카나주와 움브리아주의 경계인 티베리아계곡을 거쳐 움브리아주를 꿰뚫어 흐른다. 라치오주와의 경계에서 네라강과 합류하여 로마시가를 지나 오스티아 및 피우미치노의 하구에서 티레니아해로 흘러든다. 하구에는 고대로마의 항구도시로 번영하였던 오스티아의 유적이 남아 있다. 지류를 포함하여 수력발전을 위한 이용가치가 매우 크며 중부의 움브리아주에서는 관개용수로 많이 이용된다. 강물에 의해 운반되는 방대한 토사의 퇴적으로 2500년 동안 하구가 바다를 향해 4㎞ 정도 전진하였다. 하천 양쪽에 로마시가가 있는데 좌안에는 근대로마의 중심을 이루는 베네치아광장, 우안에는 바티칸이 있다.
로마시내의 한 언덕에 있는 건물
로마 시내 쇼핑중 사진 한장
콜로세움
로마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콜로세움이다. 이처럼 콜로세움은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며 원래는 훌라비오 원형극장으로 불리워졌다.
콜로세움
콜로세오란 이름의 기원은 콜로세오 자리가 네로의 연못이었다 .그 옆에 네로의 거상이 있었는데 그상이 너무 커서 (Colossus) 거대한이란 언어에서 나왔다.
콜로세움
네로가 죽은후 로마의 황제들이 네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네로의 연못을 없애고 그곳에 지금의 콜로세오를 만들었다. 콜로세오는 초기의 극장으로 지어졌으며 후에 검투사들의 검술 시합, 맹수사냥, 모의해전 등 수시로 벌어졌고 후에는 기독교인들이 맹수의 먹이가 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
콜로세오 바로 오른쪽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이 있다. 이 개선문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테베레 강변의 미르비오 다리에서 마크센티우스를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312년 로마 시민과 원로원이 세운 것이다. 파리 개선문은 이것을 모델로 만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앞에서
콜로세움
네로가 죽은후 로마의 황제들이 네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네로의 연못을 없애고 그곳에 지금의 콜로세오를 만들었다. 콜로세오는 초기의 극장으로 지어졌으며 후에 검투사들의 검술 시합, 맹수사냥, 모의해전 등 수시로 벌어졌고 후에는 기독교인들이 맹수의 먹이가 되기도 했다.
콜로세움
콜로세오는 신분에 따라 1층에 황제, 2층은 무사, 3층 로마 시민권자, 4층 일반인과 여 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관중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대한 천막을 지붕에 덮었다고 한다. 콜로세오는 5만명을 수용하며 입구가 80개 5분안에 모든 사람이 입장 할 수 있도록 설계를 했다고 한다.
콜로세움 주변의 유적지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
벽면을 장식한 부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업적을 묘사하고 있다.
콜로세움 앞의 모습
고대 로마시대의 의상을 대여하고 같이 포즈를 취하여 주는 사람들
비용은 얼마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함.
콜로세움
기원후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때 공사를 시작하여 8년 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때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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