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산행및여행/중국(서안,상해) 여행사진(2013년)

비림 (2013.10.17)

산을 오르다. 2013. 10. 2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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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 (2013.10.17)

 

 

- 비석의 숲이라고 일컬어지는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 뻬이린보우관)은 원래 공자문묘(孔子文廟)였던 곳에 지어진 곳이다. 1087년 북송조 원우 2년부터 당나라 비석들을 옮겨오면서 형성되었으니, 이미 9백여년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 비림 박물관에는 한나라 때부터 근대의 각종 비석, 묘지명 2,300여개가 있는데 그 중에 1,807개의 비석을 7개의 진열실과 8개의 비정(碑亭)과 6개의 비랑(碑廊)에 전시하고 있다. 석각예술실에는 100여 건의 한(漢)대부터 당(唐)대의 릉에서 출토된 석각예술과 종교 석각예술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총 면적은 31,900평방미터이며 진열실 면적은 3,000평방미터에 달한다.

- 비림박물관은 전형적인 사당식 건물로 현재도 여러 면에서 공묘(孔廟)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비림박물관에는 반원 모양의 호수와 그 위에 놓인 돌다리가 있다. 원래 공자문묘는 지명도나 규모에 따라 등급이 나누어져 있는데 이곳은 등급이 낮아 반원호수를 조성했다. 반면 공자의 고향에 있는 문묘에는 등급이 높은 원형 호수가 놓여 있다.

- 호수 위의 돌다리를 건너 문을 들어서면 길 양쪽에 늘어선 정루(井樓)와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이 조각상들은 실크로드 시발점에서 가져온 것으로, 말과 낙타의 고삐를 묶었던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정루 안에는 황제가 쓴 공덕비가 들어있다. 청나라 강희제에서부터 건륭제에 이르는 시기는 소란과 분란도 많았으나 이를 다스리고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 '비림'이라고 쓰여진 현판에는 '碑'자에 점 하나가 없다. 현판은 청나라 때 아편을 싣고 온 영국의 배를 태워 아편전쟁(阿片戰爭)을 부른 임칙서(林則徐)가 쓴 것이다. 당시 임칙서는 아편전쟁이 화친으로 돌아서자 전쟁도발자로 몰려 신강위구르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임칙서는 유배지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임칙서는 나머지 점 하나를 쓰겠다고 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병사하여 글자를 끝내 채우지 못했다. 그 때의 아쉬움이 남아 있는 듯하다.

 

 

 

 

 

 

 

 

 

 

 

 

 

 

 

 

 

 

 

 

 

 

 

안진경의 다보탑 감응비

 

 

안씨가문의 족보를 새긴 안진경의 안씨가묘비

 

 

 

 

 

 

 

 

 

 

 

 

 

 

집자괴성점두도

正心修身 克己復禮의 8글자로 형성

왼손으로 벼루를, 오른손에는 붓을 쥐고 있다.

한쪽 다리를 뒤로 들어올려 "斗"자를 받치고 있고, 다른 발은 "熱"위에 올려져 있다.

 

 

이 비석은 "관제시죽(關帝詩竹)" 이라 한다

관우가 지은 대나무 시라고 하는데, 제(帝)는 임금이니 관우는 비록 장수몸으로 죽었지만 사후 그를 왕으로 칭송한다

여기 비림을 관리하는 와룡사의 사천왕 가운데 관우상이 있었고 화산에도 관우를 모시는 절이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불사동군의(不謝東君意) 단청독립명(丹靑獨立名)

막혐고엽담(莫嫌孤葉淡) 종구불조령(終久不凋零)

 

“조조의 호의에 감사하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관우는 몸이 비록 조조의 숙영지에 있지만 마음은 대나무처럼 영원히 변치 않고 유비와 장비와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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