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산행및여행/중국(북경,서안) 여행사진(2013년)

중국 베이징 자금성 (2013.10.09)

산을 오르다. 2013. 10. 15.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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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 자금성  (2013.10.09)

 

 

 

 

 

 

 

 

 

◈ 자금성((紫禁星)◈

★ 자금성((紫禁星)은 중국의 후기 봉건왕조였던 명(明)과 청(淸)의 왕궁으로서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재위 1402-1424) 4년인 1406년에 착공되어 영락 20년인 1420년에 완공되었으며,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퇴위할 때까지 24명의 황제가 491년간 이곳에 기거하면서 중국을 통치하였다.

★ 오늘날의 이름은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다. 흔히들 줄여서 고궁(故宮)이라고 한다.

★ 1987년 "명·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자금성은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터 면적이 23만6,000 평(79ha)이고, 둘래가 3,428m 이다. 이 안에 980채의 건물이 들어 서있으며 건축면적만도 4만 7,000여 평에 이른다.

★성내는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으며, 남쪽은 공적(公的)인 장소의 바깥부분으로 오문에서부터 북쪽으로 태화문(太和門)·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 등의 전각(殿閣)이 배치되어 있다.

★ 바깥부분, 즉 외조(外朝)의 북쪽은 황제의 사적인 생활을 위한 내정(內廷)으로서 보화전 북쪽에 있는 건청문(乾淸門)으로부터 건청궁(乾淸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 등이 한 줄로 늘어서 있으며, 그 좌경(左京)에 많은 건물이 있다. 내정은 1925년 이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으로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중국 문화재의 전당이 되고 있다.

 

▣ 관람 코스

이와 같이 방대한 관람대상을 효율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은 중로(中路), 서로(西路) , 동로(東路)의 세 갈래 길을 안내하고 있다.

-중로(中路)는 오문과 북쪽 정문인 신무문을 있는 남북 중추선상의 건물군을 관람하는 코스로 태화문광장,태화문,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그리고 건청문광장과 후3궁인(건청궁 교태전 곤녕궁),어화원,흠안정등이다.

-서로(西路) 와 동로(東路)는 중로와 같이 진행하다가 건청문광장에서 서쪽 또는 동쪽 건물을 돌아보고 어화원으로 합쳐지는 코스이다.

 

 

 

 

 

 

자금성 가는길의 천안문 모습

 

천안문 성루(城樓)

장안대로를 사이에 두고 천안문 광장은 남쪽에, 성루는 북쪽에 위치하며, 천안문 성루는 모택동의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기에 쉽게 눈에 띈다.

1949년10월1일 모택동이 이 성루에 올라서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세계에 공포한 이후 더 유명해졌다.

 

이 성루는 명 영락15년(1417년)에 승천문(承天門)이란 이름으로 만들었으나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의 것은 청 순치8년(1651년)에 다시 황성의 정문으로 만든 것이고 이름도 지금의 천안문으로 고친 것이며, 높이가 34.7m이다.

 

천안문과 화표

천안문의 앞과 뒤에는 한 쌍의 화표(華表)가 만들어져 있다.

화표란 중국의 옛 건축물 앞에 만들었던 것은 상징성과 건물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만드는 것이다.

 

천안문의 돌로 만든 솟대처럼 보이는 이것 꼭대기를 보면 새 머리처럼 생긴 상상의 동물이 있다. 머리를 약간 들고 있다.

화표 꼭대기에 앉아 있는 이 새는 한자로 후(犼)라고 쓴다. 이 상상 속의 새는 주위 감시를 잘 하는 동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천안문 앞의 새는 머리가 전방을 향해 있는데 “망천후(望天犼)”라 부르는 데, 황제가 민정시찰 나가서 오래 안 돌아올 경우는 궁 안에도 할 일이 많이 밀렸으니 빨리 궁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망군귀(望君歸)”, 천안문 뒤에 있는 새는 황제가 궁 안에만 오래 동안 있게되면 궁 안에만 있지 말고 궁밖에 나가서 민정도 잘 살피고 오라고 재촉하는 “망군출(望君出)“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안문의 모습

 

천안문앞에서 본 인민대회당

 

천안문을 지나서 궁으로 입장

 

단문의 모습

 

단문

단문(端門) 성루(城樓)는 명(明) 영락 18년(1420) 오문(午門)과 함께 건설되었고, 천안문(天安門)과는 건축적으로 거의 동일하며 성루에는 황제의 주요 의장(儀仗) 용품을 보관하였다.

천안문과 오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단문은 진시황(秦始皇)에게서 유래된 것으로 시황제는 궁성의 대문 앞에 또 다른 문을 건설하여 궁을 출입하는 이들이 예를 갖추는 곳으로 삼았다.

자금성(紫禁城)도 이를 따라 단문을 세웠고, 문무백관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이곳을 통과할 때 의관(衣冠)을 단정(端正)히 고쳐 입어야 했다. 그래서 단문을 예문(禮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단문 성루는 자금성내의 고건축물 중 보존이 잘 되어있는 건물 중 하나이며, 성루에 오루면 주위의 태묘와 사직단의 경관을 잘 볼 수 있다.

 

오문

영락황제는 오문을 방어에 적합한 " U "형으로 건설하였는데 음기가 강한 형태이기에 양기의 의미를 포함한 "오(午)"자롤 사용하여 오문이라 이름 붙였다.

오문은 양(陽)을 의미하고 단문은 정(正)을 의미하며 이 두 정문은 "정양(正陽)"의 의미여서 음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졌기에 다른 성문들과는 달리 이 두문의 명칭만은 오랜세월 변하지 않았다.

단문에서 오문까지의 광장 면적은 30.680평방제곱미터이며 어도(御道) 양측에는 좌우로 6조(曺)가 사용하는 조방(朝房)이 100여칸이 있었다.

 

오문

 

오문

자금성의 정문에 해당하며 1420년에 세워진후 수차례에 걸친 화재로 청(淸) 순치(順治)4년(1647)에 중건된 후, 가경(嘉慶)6년(1801) 보수공사를 하였다.

오문에는 5개의 문동(門洞:아치형 통로)이 있고, 중앙의 문(중문:속칭 어로문)은 황제만이 이용할 수 있는 문이며, 황제외에는 황후가 시집올 때 한 번, 보화전에서 황제의 집전으로 치러지는 전시(展試)에 1,2,3등 합격자들이 벼슬길에 오를 때 한 번만 사용이 가능했다.

 

오문에서 본 단문

 

금수하(金水河)와 협화문

 

태화문광장의 숭루

 

오문의 뒷면과 금수교(金水橋)

 

태화문

 

태화문

 

태화문

 

태화문과 청동사자

 

여의주를 누르고 있는 청동사자와 태화문

 

태화문 현판

 

태화문의 답도

 

태화문에서 본 태화전

 

태화문 측면 건물

 

태화문의 뒷면

 

태화전

 

태화전

 

태화전과 답도

 

태화전 측면 건물

 

태화전 측면 건물

 

태화전 현판

 

태화전에서 본 광장과 태화문

 

건극수유(建極綏猷)

건극수유 편액은 건륭황제의 친필을 복제한 것이다.

건극수유란 천자는 위로는 하늘의 뜻을 따르고, 아래로는 민의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제왕은 나라를 세워 잘 통치하여야 하며, 백성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뜻이다.

태화전의 내부에는 기둥들 사이 중앙에 2m 높이의 대리석 계단인 "수미단(須彌壇)"(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단)이 있고 그 위에 아홉마리 황금 용이 새겨진 보좌(寶座)가 있다.

 

일구(해시계)

 

교태전과 중화전

 

망주(望柱)

기단은 용과 봉황이 교대로 조각되어 있는 1,488개의 망주(기둥석)로 둘러 있다.

 

망주와 태화전 주변 건물

 

태화전 주변 건물

 

중화전

 

중화전 현판

 

중화전 내부의 모습

윤집궐중(允執厥中) : 건륭황제가 쓴 친필 편액이다. 윤집궐중이란 "집중해서 진실로 중도를 지켜라"라는 의미로 "정성과 진심으로 공정한 길을 가야만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이다.

중화전은 명,청시대 태화전에서 거행하는 여러 의식에 참여하는 황제가 태화전으로 나아가기 전 휴식하며 예부 및 의식을 집전하는 집사관들의 알현을 받던 곳이다.

 

보화전에서 본 태화전의 뒷모습

 

보화전의 모습

보화전은 명나라 영락18년(1420)에 세워졌으며, 명 초기의 명칭은 근신전이었으나 가정제시기에 화제로 소실되었다. 명 가정41년(1562) 건물을 다시 세우고 건극전으로 개칭하였다. 청나라 순치 2년(1645) 보화전으로 개칭하였으며 청 건륭년간(1736~1795)에 중소하였다.

명대에는 큰 의식을 치르기 전 황제가 의복을 갈아입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황후나 황태자의 책립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청대에는 매년 제석,음력1월15일에 황제가 소수민족의 왕공과 대신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공주가 시집갈 때 부마와 3품이상 관원에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보화전 현판

 

보화전 내부

황건유극(皇建有極)이란 건륭제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는데, "천하를 다스리는 최고의 준칙은 천자가 결정한다"는 뜻으로 황권을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보화전에서 본 중화전의 모습

 

보화전의 유금동항(流金銅缸)

 

손잡이 장식

 

보화전 주변의 건물

 

중화전과 태화전의 모습

 

보화전 주변의 건물

 

보화전에서 본 건청문과 건청궁의 모습

 

건청문과 주변의 건물

 

보화전 주변의 건물

 

보화전 뒤의 운용대석조(雲龍大石雕)

보화전 뒤 계단 중앙에는 하나의 커다란 돌 덩어리에 구름,9마리의 용, 해수(海水), 산애(山厓) 등이 조각되어 있는 어로석인 답도가 있는데, 이를 운룡석조 또는 운룡대석조라 부른다.

9마리의 용이 구름,바다,산들 사이를 유유히 나르며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새긴 운용석조는 명초에 새긴 것인데 청나라 건륭황제가 이 문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0.38cm를 깍아내고 새로 조각한 것이라 한다.

운룡석조는 길이 16.57m, 폭 3.07m, 두께 1.7m, 무게 200여t의 큰 애청석(艾靑石)으로 만들어졌으며 자금성에서 제일 큰 돌조각이다.

 

건청문의 모습

 

건청문앞의 동사자상

 

건청문에서 본 보화전 뒷면의 모습

 

건청문 현판

 

건청문에서 본 건청궁의 모습

 

건청궁 가는길에 본 건청문 뒷모습

 

건청궁 현판

 

건청궁

 

건청궁 내부의 모습

정대광명(正大光明) : "정대광명" 즉 "바른것을 밝힌다"는 의미의 이 편액은 청 순치제(順治帝)의 글씨이다. 아버지의 글씨를 흠모했던 강희제는 이 글씨를 본떠 돌에 새기도록 하였으며, 지금의 편액은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때인 1790년에 만든 것이다.

청 강희제(1661~1722)이후 황제가 생전에 황위 계승자를 선포하지 않고 후계자의 이름을 적어서 휼갑(譎匣:작은 함)에 봉해 넣고, "정대광명"이라는 편액 뒤어 보관하였다가 황제가 죽은 후 이것을 열어 황제의 신변 가까이에 두었던 또 한장의 계승자 이름과 일치해야 다음 황제 계승자를 선포하였다고 한다. 이는 황자(皇子)들의 기량을 높이고 치열한 황권 다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건청궁에서 본 건청문의 모습

 

건청궁 주변의 건물

 

교태전

교태전은 황후와 관련된 장소로서, 명나라 때에는 황후의 침실로 택일을 받아 길일이 되면 황제와 황후가 이곳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

청나라때는 황후의 공식 업무와 옥새를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황후가 명절이나 생일을 맞아 황제의 후궁과 자손, 그리고 신하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던 곳이다.

 

교태전 현판

 

교태전 내부

 

건륭황제어제 '교태전명' (建隆皇帝御制交泰殿銘)

전(殿) 가운데 보좌(寶座)가 있고 보좌 뒤에는 건륭제(建隆帝) 어필(御筆)의 교태전명(交泰殿銘)이 쓰여진 4폭 병풍이 있다. 교태전에 대해 기록한 교태전명에는 "건청궁 뒤에 있고 곤녕궁앞에 있으며 전(殿)의 이름은 땅과 하늘이 서로 크게 교차하는 교태(交泰)의 괘(卦)에서 취하였다..."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무위(無爲)

교태전명이 쓰여진 4폭 병풍 위로는 강희제 어필인 "무위(無爲)"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무위(無爲)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행함이 없다"이지만 "무위"의 본뜻은 행함의 유무를 떠나 "억지로 꾸미는 작위(作爲)와 가삭(加飾)과 허위(虛僞/虛威)가 없다"는 것이다.

무위는 도교의 정치적 이상인 '무위지치(無爲之治:성인의 덕이 지극히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천하가 잘 다스려짐)'를 나타낸다.

 

교태전의 모습

 

곤녕궁의 모습

곤녕궁은 명대에는 황후의 침궁이었으며 중궁으로 불렀다. 청대에는 황후의 침실이 아닌 만주족의 전통종교인 살만교(薩滿敎,Shamanism)의 제신(祭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곤녕궁 현판

 

곤녕궁 주변의 건물

 

곤녕궁의 신방

청대 강희제 년간에는 동난각이라고 부르는 동쪽 끝 2칸을 황제가 대혼(大婚,결혼)을 치르게 되면 3일간 신방을 차리는 동방(洞房)으로 바꾸어, 청나라의 강희, 동치, 광서, 선통 4명의 황제가 태화전에서 공식적인 혼례 행사를 치른 후 이곳 곤녕궁 동방을 신혼방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동방내의 장식과 진설은 광서제 대혼시의 원래 상태 그대로 이다.

신방 침실 위에는 일승월항(日升月恒 : 시경 등에 나오는 문구로 해돋이와 초승달처럼 세력이 더욱 강해짐을 의미함)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곤녕궁에서 본 곤녕문의 모습

 

곤녕궁의 답도

 

곤녕궁의 뒷모습

 

어화원(측백나무 연리지와 청동향로)

 

측백나무 연리지와 청동향로

 

천일문

 

 

어화원

 

 

 

어화원

 

 

 

어경정

 

 

 

어경정 주변의 풍경

 

 

 

어경정

 

 

 

어경정

 

 

 

어경정

 

 

 

어경정 주변의 풍경

 

 

 

어경정과 백송

 

 

 

흠안전,승광문

 

 

 

승광문 주변의 동코끼리상

 

 

 

집복문

 

 

 

승광문

 

 

 

어경정과 영화문

 

 

 

궁내부에서 본 신무문

 

 

 

승광문

 

 

 

순정문

 

 

 

신무문 밖에서 본 성벽

 

 

 

신무문

 

 

 

신무문에서 본 경산

신무문과 마주보고 있는 경산(景山)은 전체 면적은 약 23㎢, 높이 108m로 베이징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소나무와 삼나무 등의 고목들이 울창하게 솟아있는 정원형 인공산으로, 명대에 자금성을 건설하며 파낸 흙이 하나의 흙산을 이루게 되면서 조성되었다.

 

 

 

해자

 

 

 

신무문 현판

 

 

 

신무문

 

 

 

신무문의 모습

 

 

 

해자

 

 

 

신무문앞 해자인 통자하(筒子河)

신무문 앞에는 성의 둘레를 따라 외부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조성되어진 폭 52m, 깊이 6m의 해자가 있는데, 그 이름을 통자하라 한다.

 

 

 

각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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