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묘,무덤

강화 석릉 (2020.05.21)

산을 오르다. 2020. 5. 2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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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석릉 (2020.05.21)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후기 제21대 희종의 능. 왕릉. 사적.

개설

강화 석릉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왕릉 중 하나이다. 강화 석릉 외에도 이 시기에 강화 곤릉(), 강화 가릉(), 강화 홍릉() 등의 왕릉이 조성되어 현존하고 있다.

역사적 변천

고려시대 강화에 석릉이 조성된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봉분한 바 있으며, 관리 소홀로 봉분이 붕괴되고 주변 석물들이 없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 정비하였다. 2001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사업을 시행한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되었다. 사적으로 지정될 당시의 문화재명은 곤릉(1992년 3월 10일 지정)이었는데, 2011년 강화 곤릉(7월 28일 고시)으로 변경되었다.

내용

희종은 신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 )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임씨( )이다. 왕위에 오른 희종은 1211년(희종 7)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1237년(고종 24) 8월 법천정사()에서 훙어하여 낙진궁()으로 옮겨졌으며, 10월 덕정산() 남쪽에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고려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1232년(고종 19) 개경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겨 1270년(원종 11) 환도하였기에, 희종의 능은 개경이 아닌 강화에 안치된 것으로 보인다.

특징

강화 석릉의 능역은 가로 20.5m, 세로 31m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고려시대 왕릉의 제도에 따라 묘역에 5단으로 단이 구획되어 있다. 봉분은 지름 4m, 높이 1.8m 규모이다. 가로 3.3m, 세로 2.2m, 높이 2.3m 규모의 석실이 존재하는데, 석실 내에 부장대는 없고, 내부에 벽화도 없다.

2001년 발굴조사를 통하여 석인상, 능비석, 표석 등의 석물이 확인되었고, 청자류, 청자편, 철제 및 동제 금속류, 금박편, 동전편 등이 발굴되었다.

한편 조사지역인 석릉 주변으로 동쪽 능선과 북쪽, 남쪽 경사면을 중심으로 120여 기 이상의 고려시대 고분군이 확인된다.

의의와 평가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고려시대 왕실의 묘제에 대하여 직접 접할 수 있는 남한 내 문화유산으로 의미가 있다. 최근 인천광역시에서는 강화 석릉을 포함한 강화 소재 고려 왕릉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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