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가릉 (2020.05.21)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고려후기 제24대 원종의 왕비 순경태후 김씨의 능. 왕비릉. 사적.
개설
강화 가릉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왕릉 중 하나이다. 강화 가릉 외에도 이 시기에 강화 석릉(碩陵), 강화 곤릉(坤陵), 강화 홍릉(洪陵) 등의 왕릉이 조성되어 현존하고 있다.
역사적 변천
고려시대 강화에 가릉이 조성된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관리 소홀로 봉분이 붕괴되고 주변 석물들이 없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 정비하였다.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사업을 시행한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되었다. 사적으로 지정될 당시의 문화재명은 가릉(1992년 3월 10일 지정)이었는데, 2011년 강화 가릉(7월 28일 고시)으로 변경되었다.
내용
순경태후 김씨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고려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익공(莊翼公) 김약선(金若先)의 딸이다. 고려 무신정권기 집권자 중 한 명인 최우(崔瑀)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원종이 태자가 되기 이전 입궐하여 경목현비(敬穆賢妃)로 책봉되었다. 1235년(고종 22)에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가 되었으며, 1236년(고종 23) 충렬왕(忠烈王)을 낳고, 1244년(고종 31) 훙서하였다. 원종이 왕위에 올라 1262년(원종 3)에 추봉(追封)하여 정순왕후(靜順王后)로 삼았고, 아들 충렬왕이 즉위하여 1274년(충렬왕 즉위년) 12월에 순경태후로 추존(追尊)하였다. 1310년(충선왕 2) 원(元) 무종(武宗)이 제서(制書)를 내려 고려 왕비로 추봉하였다.
고려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1232년(고종 19) 개경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겨 1270년(원종 11)에 환도하였기에, 순경태후의 능은 개경이 아닌 강화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강화 가릉은 강화 진강산에서 남으로 뻗어내린 능선상에 위치한다.
특징
강화 가릉은 개경의 왕릉과 비교할 때 형식상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으나 규모가 작은 편이다. 능역은 가로 11m, 세로 14m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고려시대 왕릉의 제도에 따라 묘역에 단이 구획되어 있는데, 강화 가릉의 경우 3단으로 이루어졌다. 봉분은 지름 7.6m, 높이 2.5m 규모다. 가로 2.55m, 세로 1.68m, 높이 1.78m 규모의 석실이 존재하는데, 석실 내에 부장대는 없고, 벽화의 흔적이 존재하지만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다.
봉분 북동쪽과 북서쪽 모서리에 석수(石獸)가 있으며, 석실 전면에 석인상이 석실을 중심으로 동서로 마주 보고 있다. 봉분 서편에는 하대석 및 옥개석, 동자주가 진열되어 당시 능역에 배치된 석물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고려시대 왕실의 묘제에 대하여 직접 접할 수 있는 남한 내 문화유산으로 의미가 있다. 최근 인천광역시에서는 강화 가릉을 포함한 강화 소재 고려 왕릉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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