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묘,무덤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양효안공신도비부묘소) (2020.10.15)

산을 오르다. 2022. 7. 27. 17:59
728x90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양효안공신도비부묘소) (2020.10.15)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있는 조선전기 제4대 세종의 부마 안맹담과 정의공주의 무덤. 신도비. 시도유형문화재.

내용

1982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도봉산 남쪽의 작은 봉우리인 시루봉 기슭에 있다.

나란히 자리잡은 쌍분의 묘앞에는 ‘수록대부연창위시양효공안맹담지묘(祿)’와 ‘정의공주지묘()’라고 각각 새긴 묘갈과 상석이 있으며, 장명등과 문인석 4구가 서 있다.

이 지역은 죽산 안씨() 집안의 묘역으로서 많은 분묘와 석비들이 산재해 있어 조선시대 가족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원래 이 묘소터는 고려의 상장군 강택() 부부의 묘지였다고 한다. 1462년(세조 8) 양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풍수가를 전국에 보내 묘자리를 찾았는데, 지금의 자리인 양주 해동촌 자좌원()을 명당자리로 지목하였다.

이에 공주는 임영대군()을 재촉해 그 자리를 잡게 해달라고 세조에게 아뢴 후 허락을 받아 강택의 묘를 옮기고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신도비의 형태는 거대한 화강석 귀부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과 이수가 한 돌로 된 통비이다. 이수는 여의주를 놓고 쌍룡이 다투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지대석 위에 놓인 귀부는 경복궁 안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으로, 거북 조각은 강인하면서 매우 정교하고 뛰어나다.

신도비의 총 높이는 382cm, 비신의 높이는 187cm, 폭은 104cm, 두께 26cm로 비문의 끝에 ‘(성화2년병술립)’의 기록으로 보아 1466년(세조 12)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정인지()가 짓고, 전액과 글씨는 안맹담의 넷째 아들 빈세()가 썼다. 현재 비문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우나 전문이 전해지고 있다.

안맹담은 함길도도관찰출척사 안망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죽산()이다. 1428년(세종 10) 부마가 되어 죽성위()에 봉해졌다가 이어 연창군()·연창위()로 개봉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어 수록대부에 올랐다.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활도 잘 쏘고 음률과 약물에도 밝았다 한다. 공주는 1477년(성종 8)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 해 공주의 원찰로 삼각산 동쪽에 도성암(, 현 도선사로 추정됨)이 창건되었다. 묘역의 방학로 길 건너 맞은 편에는 연산군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1982년 11월 13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良孝安公神道碑附墓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의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안맹담의 신도비.

개설

안맹담(安孟聃)[1415~1462]의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자는 덕수(德壽)이며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명문 출신으로, 1428년(세종 10) 세종의 둘째 딸 정의 공주(貞懿公主)와 혼인, 부마가 되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1432년(세종 14)에는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고, 1442년(세종 24)에 숭록대부(崇祿大夫), 1444년(세종 26)에 관제 개편으로 광덕대부(光德大夫)가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종실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 부마를 위(尉)라 개칭하기로 하였으므로 이후 연창위(延昌尉)라 불리었다.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평소 초서에 능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으며, 음률과 약물(藥物)에도 해박하였다. 불교에도 관심이 컸다 한다. 1462년(세조 8)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건립 경위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는 1466년(세조 12) 후손들이 안맹담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위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방학 사거리에서 우이 계곡 방면으로 방학로를 경유하여 가다가 고갯길이 나오기 직전 도로 우측에 죽산 안씨 묘역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중 동쪽 묘역에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이 위치해 있다.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 입구에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형태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는 귀부 이수형의 일면 비이다. 귀부는 화강암으로 높이 190㎝, 너비 170㎝, 두께 280㎝, 비신은 대리석으로 높이 190㎝, 너비 90㎝, 두께 26㎝이다.

금석문

비문은 안맹담의 사돈인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가 지었으며, 글씨와 전액(篆額)은 안맹담의 넷째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썼다. 비제는 ‘유명 조선국 부마 수록대부 □창위 시양효공 □□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駙馬綏祿大夫□昌尉諡良孝公□□神道碑銘幷序)’라 되어 있다. 안맹담의 가계와 행적을 약술한 후 공덕을 칭송하였다. 비문은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도 수록되었다.

현황

현재 소유 및 관리는 죽산 안씨 문중의 안민영 외 17명이 담당하고 있다. 1982년 11월 13일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이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것 중 최초의 귀부 이수형 신도비이다. 약간의 파손에도 불구하고 정교한 조각과 글씨가 잘 남아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良孝公安孟聃神道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인용)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

 

신도비 귀부의 모습

 

신도비 귀부의 모습

 

신도비 이수의 모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