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지방문화재

충주 관아공원(충주 청녕헌,충주 제금당,충주축성사적비) (2020.09.27)

산을 오르다. 2022. 7. 2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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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관아공원(충주 청녕헌,충주 제금당,충주축성사적비) (2020.09.27)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터.

변천

충주 청령헌()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83년 보수할 때 옥개 부분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1870년(고종 7) 8월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같은 해 10월에 충주목사 조병로()의 지시로 창룡사를 옮겨 중건한 건물임이 밝혀졌다. 그 동안 내부를 개조하여 중원군 청사로 사용하다가 1983년 군청이 이전하면서 해체 복원하였다.

충주 제금당()은 조선시대 초기 지방 행정 정청으로 1870년 청령헌과 함께 소실되었던 것을 충주목사 조병로가 중건하였으며, 이듬해 출입문인 내삼문을 세웠다. 충주읍사무소, 중원군수의 관사로 사용해 오다가 1983년 해체 복원하였다. 청령헌과 제금당이 있는 관아 터는 현재 관아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관아공원에는 충주읍성의 준공을 기념하고자 건립한 충주 축성 사적비가 있다.

위치

충주시 성내동 제2로터리에서 안림동 방향으로 150여m 가다가 삼거리에서 우체국방향으로 120여m 거리의 관아공원에 있다.

현황

관아 터에는 관아 건축인 청령헌과 제금당, 산고수청각()이 자리 잡고 있다. 청령헌은 조선시대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이다. 우측 3칸은 대청, 좌단 1칸은 전면과 후면에 툇마루를 둔 마루방이며, 대청 좌측 2칸은 전면과 후면에 툇마루를 둔 온돌방이다. 우단 1칸의 하부는 함실, 상부는 누마루로 되어 있다.

구조는 가공된 장대석으로 된 2단 기단 위에 원형의 주좌를 새긴 8각 주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워 이익공 양식의 공포를 구성하였다. 창방으로 결구된 기둥 사이에는 초각이 없는 화반을 각 1칸에 1구씩 배치하여 주심도리 장혀를 받치고 있다. 가구는 전후 평주 사이에 양내고주를 세워 대량과 퇴량을 짜 맞추고, 대량 상부에는 낮은 동자주를 놓고 종량을 받쳤으며, 종량 위에는 사다리꼴 대공을 설치한 7량집이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제금당은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의 전퇴집이다. 중앙 2칸의 통칸을 대청, 우측 2칸은 온돌방과 마루방, 대청 좌측의 3칸은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는 가공된 장대석으로 된 2단 기단 위에 방형 주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워 이익공 양식의 공포를 구성하였다.

창방으로 연결된 기둥 사이에는 맨 왼쪽 칸을 제외하고 1칸에 1구씩 화초 모양 장식이 있는 화반을 배치하여 주심도리 장혀를 받치고 있다. 가구는 전후 평주 사이에 양내고주를 세워 대량과 퇴량을 짜 맞추었는데, 대량 상부에 종량을 가구하지 않고 대량 상부 중앙에 직접 동자주형의 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친 특이한 가구 방식의 민도리 5량집이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수직청인 산고수청각은 제금당 뒤쪽에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중앙 2칸과 오른쪽 칸은 툇마루가 붙은 온돌방이고, 왼쪽 칸은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는 가공된 장대석으로 된 2단 기단 위에 화강암 사각 주초석을 놓고 외부에서는 원형 기둥을, 내부에는 민흘림 방형 기둥을 혼합하여 세우고 있다.

공포와 창방을 생략하고 전면 기둥 상부에만 장방형의 보아지만을 건물 내외 방향으로 붙여 퇴량을 받치고 있다. 가구는 전후 평주 사이에 내고주를 세워 대량과 퇴량을 연결하고, 대량 상부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올리고 종량 위에 사다리꼴 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친 5량집이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의의와 평가

지방 관아의 대표적인 건물인 청령헌은 권위 있고 변화 있는 입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온돌 구조가 특징적이다. 조선시대 초기 지방 행정의 정청인 제금당은 별관 건물로는 유일한 현존 건물이다. 수직청인 산고수청각은 간결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관아 터에 동헌, 정청, 수직청만 남아 있어 관아 전체의 구성을 알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관아 터와 관련하여 객사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는 알기 어렵다.

[忠州官衙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인용)

 

 

 

충청감영문

 

관아공원 빗돌과 충청감영문

 

중원루(충청감영문)

 

중원루(충청감영문)

 

솟을삼문

 

충주관아공원의 모습

 

충주 축성서적비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조선후기 충주성의 축성 관련 내용을 기록한 기적비. 시도유형문화재.

내용

전체 높이 2m, 비신의 높이 1.38m, 너비 52㎝.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

1869년(고종 6)에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충주성을 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충주 동헌 앞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석의 조형은 네모난 대좌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를 지붕모양의 덮개돌로 마감한 형태로서, 조선시대 일반적인 비석 조형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화강석재로 조성된 이 축성비의 앞면에는 ‘築城事蹟碑(축성사적비)’란 제하에 공사를 시작한 날짜, 성의 둘레, 성벽의 두께와 높이, 각종 성문과 문루의 명칭 및 규모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좌측면과 뒷면에는 축성과 관계된 사람들의 명단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좌수(座首) 조광수(趙光洙)를 비롯하여 수교(首敎) 유덕관(劉德觀), 호장(戶長) 이동근(李東根), 그리고 간역장교(看役將校) 4명과 색리(色吏) 51명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忠州築城事蹟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충주 축성사적비

 

충주 축성사적비

 

충주 청녕헌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건물.

내용

정면 7칸, 측면 4칸의 겹처마팔작지붕건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 1870년(고종 7) 8월에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해 10월에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28칸을 중건하여 관아로 사용하였던 건물이다.

중앙 3칸은 우물마루를 깔아 넓은 대청으로 하였으며, 우단 1칸은 대청보다 조금 높여 전후면에 툇마루를 둔 마루방으로, 대청 좌측 2칸은 전후면에 툇마루를 둔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좌단 1칸에는 온돌방 아궁이를 만들기 위하여 하부는 함실로, 상부는 누마루를 만들었다.

구조는 가공된 장대석으로 2단 축조한 기단상에 원형주좌(圓形柱座)를 조출(彫出)한 8각주초석을 원형주로 세워 이익공(二翼工) 계통의 공포(栱包)를 구성하였는데, 앙서[仰舌]형상으로 돌출된 익공의 선단에 연봉(蓮峰)이 장식적으로 조각되어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내부로는 초각(草刻 : 당초무늬를 새긴 것)을 한 보아지(규모가 작은 집의 들보 구실을 하는 것)가 퇴량(退樑)을 받치고 있다.

또한 창방(昌枋)으로 결구된 주간에는 초각이 없는 화각반(花刻盤)을 각 칸에 1구(具)씩 배치하여 주심도리(柱心道里) 장혀[長舌]를 받치고 있다. 가구(架構)는 전후 평주 사이에 양내고주(兩內高柱)를 세워 대량과 퇴량을 결구하고 있는데 대량 상부에 낮은 동자주(童子柱 :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를 놓고 종량(宗樑)을 받쳐주고 있다.

종량 상부 중앙 부분에는 제형대공(梯形臺工)을 설치하여 종도리와 뜬창방의 이중도리와 함께 옥개부분의 하중을 받치도록 되어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7량집으로 ‘淸寧軒’ 3자의 현판이 붙어 있다. 1983년에 해체, 보수하였다.

[忠州淸寧軒]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충주 청녕헌

 

충주 청녕헌

 

충주 청녕헌 측면모습

 

충주 청녕헌

 

충주 청녕헌 현판

 

순교자 현양비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에 있는 비.

개설

천주교가 전래된 후 조선에서는 이후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으며, 그때마다 순교자나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박해의 원인과 배경은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사회 문화적 요인으로, 당시 조선은 유교를 문화적 지주로 삼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정학(正學)에 배치되는 서학은 사학(邪學)으로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조상 제사를 금하고 만인 평등을 내세우는 천주교는 반상이 엄연했던 당시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악한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또 정치적 요인으로 천주교에 대한 비판적 정치 집단이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정치 집단이나 동조 세력을 제거하는 대의 명분으로 삼아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는 1785년(정조 9) 을사추조 적발 사건이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로 이어지고, 소위 4대 박해라 불리는 1801년(순조 1) 신유박해와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1846년(헌종 12) 병오박해, 1866년(고종 3) 병인박해를 초래하였다. 충주 지역과 충주인이 직접 관련된 박해로는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병인박해가 있는데, 그중 병인박해가 가장 큰 피해를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건립경위

충주 지역의 천주교는 한강의 뱃길을 이용하여 경기도 양근에서 발원한 선교의 씨앗이 광주, 여주를 거쳐 전파되었다. 양근의 권철신, 권일신의 영향으로 충주에서는 이기연, 이부춘, 이석중, 권아기련 등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실천하다가 발각되어 1801년 신유박해 때 이들을 포함한 8명이 충주에서 순교하였다. 또 충주 출신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다른 지방에서 활동하던 이국승 등 3명도 이때 순교하였다. 또 기해박해 때에는 충주 출신 남이관이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가장 피해가 컸던 병인박해 때는 충주에서 순교한 이가 공베드로를 비롯한 112명이었고, 남종삼, 황석두와 같이 충주 출신이 서울 등 다른 곳에서 순교한 이가 31명이나 된다. 박해별 순교자 현황을 보면 신유박해 11명, 기해박해 1명, 병인박해 143명으로 모두 155명이고, 이를 지역별로 보면 충주에서 순교한 이가 120명, 타 지역에서 순교한 이가 35명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숫자와 기록에 의하여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순교자를 현양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신자들이 심문을 받았을 충주관아에 현양비를 세우기로 하고, 천주교 청주교구에서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2002년 5월 13일 현 위치에 순교자 현양비를 세웠다.

형태

순교자 현양비는 방형의 자연암 받침돌에 끝이 둥글고 길쭉한 자연석을 비신으로 하여 비석을 세웠다.

금석문

글자는 앞면에 33㎝×33㎝ 크기로 ‘순교자 현양’이라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 천주교 충주 순교자 명단의 일부가 적혀 있다.

현황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의 청녕헌 서쪽 구석에 순교자 현양비가 있다. 바로 앞에는 서울올림픽 성화 안치 기념탑비가 서 있다.

의의와 평가

박해와 순교 속에서 천주교 신앙이 널리 전파되었고, 신부 한 명 없이 몇 권의 교리책으로 신앙을 받아들여 천주교가 성장한 것은 세계 포교사에 유례없는 특이한 일로 평가된다. 충주 지역에서도 천주교에 대한 믿음과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 알림의 징표가 바로 순교자 현양비이라 큰 의미를 지닌다.

[殉敎者顯揚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사전 인용)

 

 

 

 

충주 제금당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조선시대 충주목사 조병로가 중건한 관청. 시도유형문화재.

내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1870년(고종 7) 8월에 청녕헌(淸寧軒)과 함께 소실되어 같은해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중건하여 관아로 사용하였던 건물이다.

이 건물의 중앙에는 ‘製錦堂’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대문에는 ‘蘂城別館(예성별관)’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구조는 가공이 된 장대석을 2단으로 축조한 기단상에 방형주초석을 놓고 원형주를 세워 이익공(二翼工) 양식의 공포(栱包)를 구성하였는데, 앙서형상(仰舌形狀)으로 돌출된 익공의 선단에 연봉(蓮峰)이 장식되었고, 내부로는 초각(草刻)을 한 보아지[梁奉]가 돌출되어 퇴량을 받쳐주고 있어 청녕헌과 유사한 공포의 구성수법을 볼 수 있다.

또한, 창방(昌枋)으로 결구된 주간에는 좌단간을 제외한 각 간에 1구(具)씩의 화반형(花盤形)의 초각반을 배치하여 주심도리(柱心道里) 장혀[長舌]를 받쳐주고 있다.

가구(架構)는 전후 평주 사이에 양내고주(兩內高柱)를 세워 대량과 퇴량을 결구하였는데, 대량 상부에 종량을 가구하지 않고 직접 대량 상부 중앙에 동자주형(童子柱形)의 대공(臺工)을 설치하여 종도리(宗道里)를 받치고 있는 특이한 가구방식으로 굴도리[圓道里] 5량집이다.

이 제금당은 중앙 2칸 통간을 우물마루의 대청으로 하여 이용하였으며, 대청 우측 2칸은 온돌방과 마루방으로, 대청 좌측 3칸은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마루방으로 각각 만들었는데 전면에는 모두 반칸씩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忠州製錦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충주 제금당의 모습

 

충주 제금당

 

충주 제금당 현판

 

제금당의 모습

 

충주 산고수청각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 안에 있는 조선 후기 수직청 건물.

위치

산고수청각은 관아공원 내 제금당 뒤편에 있으며, 관아공원의 북쪽에는 충청북도 충주교육청이 있고 서쪽에는 문화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변천

관아공원 내 충주 청령헌, 충주 제금당 등과 함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70년에 중건한 건물이다.

형태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2단으로 쌓은 기단에 화강석 네모뿔형 주초석을 놓았고, 외부에는 원형기둥, 내부에는 민흘림 방형기둥을 혼합하여 세웠다. 공포(栱包)와 창방은 생략하였고, 앞면 기둥 상부에만 직사각형의 보아지를 건물 내외 방향으로 붙여 퇴량(退樑)을 받치고 있다. 가구는 앞뒤 평주 사이에 내고주(內高柱)를 세워 대량과 퇴량을 연결시켰고, 대량 상부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돌렸다. 종량 상부 중앙 부분에는 사다리꼴 대공을 설치하여 민도리의 종도리를 받치게 한 5량집이다.

현황

산고수청각이 있는 관아공원 안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인 충주 청령헌, 제67호인 충주 제금당, 제68호인 축성사적비 등 지정문화재가 3건 있으며, 그 외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의의와 평가

현재 옛 충주읍성과 관련된 고건물은 충주 청령헌, 충주 제금당과 함께 3기가 남아 있으며, 충주 청령헌은 동헌 건물이다. 충주 제금당은 왕실, 고관 방문 때 사용되었으며, 이때 산고수청각은 수직청으로서 지금의 비서실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보존 관리가 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山高水淸閣]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사전 인용)

 

 

 

 

충주 관아공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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