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2016.02.19)
청계천(淸溪川)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내부에 있는 하천으로, 한강 수계에 속하며 중랑천의 지류이다. 최장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백운동 계곡'이며, 남으로 흐르다가 청계광장 부근의 지하에서 삼청동천을 합치며 몸집을 키운다. 이곳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서울의 전통적인 도심지를 가로지르다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에서 중랑천으로 흘러든다.
상류는 백운동천이라 일컫는다. 중·하류에서는 조선 조 내내 치수 사업이 전개되었으며 이로 인해 개천(開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일제 강점기에 "청계천"으로 바뀌었다.
본래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 태종때 부터 한양을 서울로 한 조선시대 내내 개거, 준설 등 치수 사업의 대상이었다.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았으나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고, 이듬해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큰 공사를 실시하였다. 청계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세종은 청계천의 지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종로의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는데,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세종은 1441년에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종 이후로 준설이 없어 토사가 지속적으로 쌓여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르자, 영조는 1760년 2월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가산을 쌓게 한다. 오간수문 안쪽에 있었던 것으로,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 남쪽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도시의 근대화에 따라 사라졌고, 현재는 오간수교 위에 표지석이 있다. 이때의 준설 과정을 《준천사실》으로 기록하였다. 개천의 물 흐름에 관심이 있었던 영조는 1773년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오간수문 근처까지 석축을 쌓았다. 이를 통해 구불구불한 하천이던 개천을 영조가 호안공사를 통해 직선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제1기 하수도개수계획(1918~1924)을 수립하였고, 이때 세종로부터 마장철교까지 5.9 km 구간과 배수가 불량한 17개의 지천을 개수하였다. 1925년 10월부터는 제2기 하수도개수계획이 수립되어 백운동천이 신교동부터 도렴동까지의 1395m 구간이 복개됨과 동시에 옥류동천.누각동천.사직동천 271m 구간이 복개되었고, 제3기 계획(1933~1936)과 제4기 계획(1937~1943) 또한 수립되었으나 진행 여부는 알 수 없다.
1926년에는 남대문로1가 부근(광통교)에서 주교까지를 복개하여 유원지를 조성하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1935년에는 청계천을 모두 복개하여 도로와 고가철도를 건설하는 계획이 마련되었다. 1939년에는 청계천 위에 자동차 전용 도로를 건설하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듬해에는 청계천을 복개하여 지상에는 전차를 놓고 지하에는 지하철을 놓은 방안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실제로 복개는 위와 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37년 태평로에서 무교동까지의 구간이 복개되었고, 1955년에는 광통교 상류 135.8m 구간에서 암거공사가 진행되었다. 광통교부터의 청계천은 1958년부터 1977년까지 복개되었고, 이때 청계고가도로가 놓였다.
1990년대에 들어 청계천의 복개 구조물과 노후한 청계고가도로의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을 공약하였고, 32대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2003년 7월 1일에 청계고가도로의 철거가 시작되었고,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에 이르는 약 5.84km의 구간을 복원하는 공사는 386,739백만원을 들여 2005년 9월 30일일에 완료되었다. 복원된 청계천의 통수단면 위쪽을 흐르는 물은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의 지하철역 부근의 지하수를 정수·소독 처리하여 조달하며, 통수단면 아래쪽을 흐르는 물은 도심의 오·폐수이다.
청계천 장통교 옆 벽면에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을 행차하는 것을 그린 반차도(班次圖)를 타일로 옮겨놓은 벽면 예술,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 복원해 놓은 복개 이전에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던 '청계천 빨래터', 청계천 복원 사업에 맞추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만든 타일 벽인 '소망의 벽' 등이 시설물로 설치되었다. 또한 '존치교각'이라는 이름으로 옛 청계천 고가도로의 교각을 3개 남겨 놓았다. 청계천 입구의 청계광장에는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가 설계하여 KT가 서울시에 기증한 소라탑이라는 작품이 설치되었다.
소라탑
청계천 복원 시작점
청계천과 소라탑
모전교(毛廛橋) : 무교동 3번지 북쪽에 있던 다리이다. 우전교(隅廛橋), 모교(毛橋), 신화방동구교(神和坊洞口橋), 신화방동입구교(神和坊洞入口橋)라고도 불렸다. 모전(隅廛)이란 '과일가게'를 이르던 옛말로, 모전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모전교로 이름지었다. 1412년 태종 12년 석교로 개축하였다. 영조 때부터 모전교로 불리게 되었다.
청계천에서 처음 만날 수 있는 다리로, 무교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광통교(廣通橋) :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이여서 옛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다.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대광교(大廣橋), 광교(廣橋) 등으로도 불렸다. 태조 때에 흙으로 축조되었다가 폭우로 인하여 무너지자 1410년 (태종 10년) 8월에 돌로 다시 축조하였다. 다시 축조했을 때 정릉의 석물로 만들었는데,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에게 넘겨 주려 하니 이에 화가 난 태종이 난을 일으켜 방석을 죽여 왕위에 올라 강씨의 묘를 옮기며 일부 돌들을 모두가 밟을 수 있게 옮겨 놓은 것이다. 또한 그 돌들은 모두 거꾸로 놓았고, 석교로 만들어진 이 다리가 가장 역사가 오래된 다리이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밝기 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해, 그 때 한양에서는 광통교가 가장 붐비었다고 한다.
복원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에 남아 있었던 돌을 다리와 석벽에 같이 배치를 하여 재조합하여 만들었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던 것(광교네거리 지하)을 청계천 복원과 함께 복원하였다. 그리고 사적 제 461호로 지정했으며,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광통교에서 본 청계천의 모습
광통교의 석물
광통교의 모습
광통교의 모습
광통교의 모습
광교 : 조선시대 광통교 터에 위치하며, 주황색으로 칠해졌다. 우정국로와 남대문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장통교(長通橋) : 장통방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했다. 형태는 하랑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장교동 한화빌딩 앞에 위치하였다. 장창교(長倉橋), 장교(長橋)라고도 했다. 이 부근에서 남산동천이 합류했다.도보 전용 다리로, 조선 시대의 장통교를 계승했으나 제대로 복원된 것은 아니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관철교이었다.
청계천의 모습
삼일교 : 삼일대로를 남북으로 잇기 때문에 삼일교라고 이름 붙였다.
청계천의 오리
청계천의 오리
청계천의 오리
수표교 :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수표를 놓기 전에는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 ; 지금의 종로5가 부근의 마전교와는 개별)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 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장충단공원에 옮겨진 옛 수표교를 옮길 자리에 도보를 위해 임시로 지은 철제 다리이다. 하지만 기존의 수표교를 다시 옮기는 데 문제가 많아 계속 사용된다.
관수교 : 관수란 수위를 관찰한다는 의미이며, 옛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돈화문로와 충무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청계천의 모습
세운교 : 세운상가와 연결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배오개다리 : 옛날 배나무가 심어져 있어 이름이 유래된 배오개(배고개)가 인근에 있어 그 이름을 땄다. 창경궁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배오개교였다.
청계천의 모습
새벽다리 : 옛 재래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천막의 이미지를 막구조로 적용하여 동대문 재래시장의 역사성과 향수를 연출하였다. 근처 재래시장에서 이른 새벽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이름을 지었다.
청계천의 오리
마전교 : 부근에 우마를 팔고사는 마전이 조선시대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붙였다. 동호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창선방교이었다.
나래교 : 평화시장 앞에 위치한 다리로, 나비의 힘찬 날개짓을 형상화 해서 동대문 의류 상권이 비상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나래1교이었다.
전태일다리(버들다리) : 청계천에 자라는 버들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전태일(全泰壹, 1948년~1970년) 열사 분신 40주년을 기해 2010년 11월 13일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했다.
오간수교(五間水橋) : 오간수문 위로 통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 가설한 다리다. 1907년 일제가 오간수문을 헐어버린 뒤로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다가 사라졌다.조선시대에 있던 오간수문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율곡로와 장충단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청계천의 모습
맑은내다리 : 인도 전용 다리로, 청계천을 순우리말로 바꿔 청계천을 상징할 수 있는 명칭으로 결정했다. 패션 중심의 상징성을 주기 위해 나비가 날개를 편 모습으로 지어졌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나래2교이었다.
다산교 : 다산로에서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지붕로와 다산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푸른내다리이었다.
청계천의 모습
청계천의 오리
영도교(永渡橋) : 조선 성종 때 승려가 놓았다고 전한다. 영미교(永尾橋), 영이별교(永離別橋), 영영교(永永橋)라고도 불렸다. 흥인지문 밖에 있는 동묘(東廟)와 왕십리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현재 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에 있었다.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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