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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지방문화재 70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비 (2024.09.24)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비 (2024.09.24)        정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성에 있는 조선후기 금위영의 이건 내력을 기록한 기적비.내용1979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총높이 1.41m, 비높이 1.05m, 너비 2.25m이다. 원래 금위영은 소동문(小東門) 안에 있었으나 그 지세가 높아 비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지기 쉬우므로 보국사(輔國寺) 아래로 옮기게 되었다. 금위영 이건기비는 이러한 사실을 적은 비이다. 비의 재료는 화강암으로 뒷면은 땅에 묻혀 있다.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붕돌을 씌웠는데 전면에만 낙수면을 새겼다.와비(臥碑)의 형식으로 비문의 끝부분에 ‘을미즉대명숭정갑신후칠십이년야도제조이이명지(乙未卽大明崇禎甲申後七十二  年也都堤調李頤命識)’이란 명문으로 보..

여주 명성황후 생가 (2024.08.01)

여주 명성황후 생가 (2024.08.01)        요약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후기에 지어져서 경기도 여주시에 남아 있는 한옥이다. 이 집은 1687년에 지어졌으며, 본래 묘막으로 사용되었다. 이 집에서 명성황후가 태어나 8세 때까지 살았다. 앞에 긴 일자형 행랑채가 있고 그 뒤로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튼 ㅁ자형 배치를 이룬다. 안채의 뒤란에는 장독대와 변소가 있고 사랑채 옆에 초가인 별당채가 있다. 이 집은 조선 후기 일반적인 양반 가옥의 배치와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 그러나 안채의 몸채와 날개채에 각각 큰 저장 공간을 마련한 것에서 애초의 용도인 묘막의 특징을 볼 수 있다.정의조선 후기, 경기도 여주에 지어진 한옥.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건립 경위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여주 감고당 (2024.08.01)

여주 감고당 (2024.08.01)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건물로 본래 서울 안국동에 있던 것을 이전·복원한 것이다.  조선시대 제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閔維重)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1866년(고종 3)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된다. 왕비로 책봉된 명성황후는 과거 인현왕후의 일을 회상하여 '감고당(感古堂)' 이란 이름을 붙였다. 본래는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던 것을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옮겼으며, 이후 여주시의 명성황후 유적 성역화 사업에 따라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복원되었다.[感古..

광주 침괘정 (2023.04.19)

광주 침괘정 (2023.04.19) 정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후기 광주유수 이기진이 건립한 누정. 누각·조경건축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개설 정확한 한자음은 ‘침과정’인데, 관례상 ‘침괘정’으로 부른다. 침과는 ‘창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으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되새긴다는 의미이다. 역사적 변천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남한지(南漢志)』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남한산성을 쌓을 때 수어사(守禦使) 이서(李曙, 1580~1637)가 울창한 숲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였다고 하며, 주변은 백제 온조왕의 왕궁터라고 전한다. 하지만 주변에는 군기고(軍器庫)가 있었다고도 하므로, 이서가 발견한 흔적은 군기고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뒤1751년(영조 27)에 ..

남한산성 행궁 (2023.04.19)

남한산성 행궁 (2023.04.19) 정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후기 좌전과 우실을 갖춘 행궁. 별궁. 사적. 내용 2007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역사·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7년 6월 8일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행궁지는 지금의 남한산성호텔 자리와 그 뒤의 공터를 모두 포함하는 약 1만 평 규모이다. 행궁의 잔재로는 산성호텔 야외휴게실 입구에 서 있는 4각 석재기둥 2개와 그 뒤에 남아 있는 1동분의 주춧돌과 여기 저기에 남아 있는 기와편, 돌축대 등이 있고, 상궐터로 보이는 곳에 주춧돌이 드러나 있다.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이라 하였으며, 1624년(인조 2) 9월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건립되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다른 행궁과 달리 종..

광주 남한산성 청량당 (2023.04.19)

광주 남한산성 청량당 (2023.04.19) 정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조선후기 남한산성 축성자 이회와 그의 처첩을 모신 사당. 시도유형문화재. 개설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妻妾)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내용 이회(李晦)는 1624년(인조 2)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築城) 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를 맡았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무고를 받고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 송씨와 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 후 그가 이룬..

연천 호로고루성 해바라기 (2021.09.09)

연천 호로고루성 해바라기 (2021.09.09) 정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 사적. 개설 200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임진강 북안에 있는 연천 호로고루는 현무암 대지 위에 구축되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2001년 이후 4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하여 견고하게 쌓은 성벽과 목책(木柵), 대형집수시설 및 각종 건물지가 조사되었으며, 연화문 와당과 치미를 포함한 많은 양의 기와, 토기, 철기유물 등이 출토되어 성곽의 구조와 함께 고구려 축성기술과 고구려의 생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호로고루는 6세기 중엽 이후 약 200여 년간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하천(國境河川) 역할을 했던 임진강 유역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에 있고,..

양평 봉황정 (2021.08.28)

양평 봉황정 (2021.08.28) 정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조선전기 문신 양성지가 건립한 팔작지붕 형태의 누정. 내용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1460년(세조 6) 대제학 양성지(梁誠之)가 단월면 보룡리 보산정에서 돌아온 황룡을 위로하고 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누각 위로는 봉황이 춤추고, 누각 아래 깊은 못에는 황룡이 서리었다고 전한다. 1790년(정조 14)에 중건하였으나 1850년(철종 1)에 소실된 것을 1967년 남원양씨 종중에서 옛 규모대로 복원하였다. 정자 내부에는 누마루를 놓았다. 주위에는 노송과 거목이 울창하고 수십길의 절벽 밑은 깊은 못으로 지금도 황룡이 그 검푸른 물 속에 숨어 있는 느낌을 준다. 정자의 아래쪽은 심성천유원지로 여름철에는 ..

한확 선생 신도비 (2021.08.28)

한확 선생 신도비 (2021.08.28)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조선전기 문신 한확의 신도비. 시도유형문화재. 내용 1495년(연산군 1) 건립. 비신의 높이 257.5㎝, 너비 129㎝, 두께 23㎝. 1985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2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네모 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를 얹었다. 받침돌 4면에는 2단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비신은 대리석제로 많이 마모되어 명문을 판독하기 어려우나 전문이 『청주한씨청원세보』·『국조인물고』 등에 실려 있다. 한확의 막내딸로서 덕종(德宗:세조 아들, 성종 부친)의 비(妃)였던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부친의 묘비가 없음을 슬퍼하자, 1494년 4월 ..

익양군 이회선생신도비 (2021.06.27)

익양군 이회선생신도비 (2021.06.27) 정의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있는 조선전기 종실인사 이회의 신도비. 시도유형문화재. 내용 198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신의 높이 205㎝, 너비 77㎝, 두께 22㎝. 비는 해발 150m의 응봉산 서쪽 능선의 묘역 아래에 위치하며, 현재 비각(碑閣) 안에 보호되고 있다. 비의 건립은 이회가 사망한 35년 뒤인 1587년(선조 20)에 이루어졌는데, 화강암제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를 한 덩어리 대리석으로 세웠다. 이수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힘차게 새겨져 있다. 비문은 좌의정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글씨는 선조 때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썼으며 두전(頭篆)은 도승지 김응남(金應南)이 썼다. 비문은 비신 앞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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