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보물

(보물 제1683-2호) 정약용 필적 하피첩

산을 오르다. 2022. 9. 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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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683-2호) 정약용 필적 하피첩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글을 담은 서첩. 2010년 10월 25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다산 정약용이 전라남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1810년(순조 10) 7월과 9월에 만든 서첩이다. ‘하피()’는 본래 조선시대 비빈()의 법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붉은 치마'라는 뜻으로, 하피첩이라는 명칭은 그의 부인 홍씨가 유배지로 부쳐온 '바래고 해진 붉은 치마[]'를 잘라 만든 것이라 하여 다산이 직접 명명하였다.

제작 배경

서문에서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할 때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는데, 시집올 때 가져온 예복으로 붉은빛은 흐려지고 노란빛은 옅어져 글씨 쓰는 바탕으로 알맞았다. 이것을 잘라서 조그만 서첩을 만들어 손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이에게 남긴다. 아이들이 훗날 이 글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부모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리는 감정이 뭉클하게 일어날 것이다"라고 이 서첩을 만들게 된 경위를 밝혔다.

다산은 부인 홍씨와의 사이에서 6남3녀를 두었으나 네 아들과 두 딸이 대부분 천연두로 사망하여 이 서첩을 만들 당시에는 장남 학연()과 차남 학유() 그리고 셋째 딸만 남아 있었다. 이때 학연은 18세, 학유는 15세였으며, 1801년(순조 1) 유배를 떠난 뒤 10년 가까이 자식들을 슬하에 두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에 두 아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 것이다.

구성과 내용

1813년(순조 13) 7월 다산이 딸에게 그려준 《매화병제도 》에 하피첩을 네 첩 만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원래 네 첩으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세 첩뿐이다. 그 중 두 첩의 서문에 각각 ‘가경 경오년 수추(; 음력 7월)’과 ‘가경 경오년 국추(; 음력 9월)’로 기록되어 1810년 7월과 9월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첩은 치마를 마름질하고 종이를 덧대어 만들었다. 천의 재질은 비단이나 옅은 갈색으로 변한 상태이며, 바느질 흔적도 보인다. 세 첩 가운데 한 첩의 크기는 가로 14.2㎝, 세로 24㎝이고, 다른 두 첩의 크기는 가로 15.6㎝, 세로 24.6㎝로 같다. 한 첩의 표지는 박쥐와 구름 무늬가 장식된 푸른색 종이, 나머지 두 첩은 미색 종이로 되어 있다. 세 첩 모두 표지 안쪽에 붙이는 면지는 붉은색 종이를 사용하였다.

내용은 선비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남에게 베푸는 삶의 가치, 삶을 넉넉하게 만들고 가난을 구제하는 방법, 효와 우애의 가치 등을 담고 있어 다산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서체는 전서·예서·행서·초서가 두루 구사되었으며,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쓰는 다산의 전형적인 행초서풍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서와 예서는 다른 서첩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필체이다.

보물 제1683-2호

이 서첩은 다산의 후손들이 대대로 보존하다가 6·25전쟁 때 분실되었다.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가 2004년 경기도 수원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가 습득한 것을 어떤 건물주가 입수하였고, 2006년 텔레비전의 감정 프로그램에 등장하여 알려진 뒤 2010년 10월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보물 제1683-1호)과 함께 다산의 강진 유배 시절을 대표하는 필적으로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후 2015년 경매에 출품된 것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낙찰 받아 소장하고 있다.

[丁若鏞 筆蹟 霞帔帖] (두산백과 인용)

 

 

 

 

 

 

2021.08.28 촬영

 

 

 

 

 

 

 

2018.12.22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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