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지방문화재

김포 덕포진. 손돌 묘 (2021.05.03)

산을 오르다. 2022. 8. 25.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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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덕포진. 손돌 묘 (2021.05.03)

 

 

 

 

 

 

 

정의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에 있는 조선후기 에 축조된 진(). 군사행정구역. 사적.

내용

198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48,794㎡. 이곳은 돈대()와 포대() 및 파수청()이 있던 곳으로,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고 하며,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보()·덕진진()·용두돈대()와 함께 축성되었다.

돈대의 위치는 한성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전략요충지로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함대와 싸웠던 격전지이다. 또, 돈대와 포대의 중심부에는 파수청터가 있는데, 이곳은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는 동시에 포병을 지휘한 장소로 생각된다.

1980년의 발굴조사 당시 7개의 포탄과 상평통보() 2개가 출토되었고, 건물터에서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건물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추정되며, 둘레에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또, 돈대터에서는 1874년(고종 11)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광성보와 맞서 있는데, 시야가 막힌데다가 해협이 매우 좁고 물살이 빠르며 소용돌이치므로 적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고려고종이 몽고병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도로 가는 길에 배를 타고 이곳의 바닷길을 지나다가 위험을 느낀 나머지 사공이 흉계를 꾸몄다고 오해하여 그를 처형하였으나,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가자 잘못을 뉘우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부근에는 당시 사공이었던 손돌()의 무덤이 있으며, 지금도 덕포진 앞의 좁은 바닷길을 손돌목이라 부르고 있다.

[金浦德浦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

 

 

 

 

덕포진 입구의 모습

 

 

 

덕포진의 철쭉

 

덕포진의 모습

 

 

덕포진의 모습

 

덕포진 포대의 모습

 

덕포진 포대와 뒤로 강화 길상산,마니산의 모습

 

덕포진 포대

 

덕포진 포대

 

손돌 묘 가는길

 

 

덕포진 포대

 

덕포진 포대

 

덕포진의 모습

 

덕포진의 조개나물

 

덕포진의 모습

 

덕포진 포대

 

덕포진 포대

 

 

덕포진의 모습

 

 

덕포진 파수청터

 

 

덕포진 파수청터

 

 

덕포진 파수청터

 

 

덕포진의 모습

 

손돌 묘

 

 

손돌 묘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에 위치한 고려 시대의 뱃사공 손돌의 무덤이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시대 몽고군이 침입하여 고려왕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이 지역의 물길을 잘 알던 뱃사공 손돌의 안내로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런데 세찬 물살에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왕은 손돌이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목을 베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면서도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알려준뒤 참수되었다.

바가지를 따라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한 왕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충직한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후히 장사를 지내주었다. 그때부터 이 좁은 물길의 이름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마다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불어오는 추운 바람을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한이 서린 바람이라 하여 손돌이 바람이라 부르고 이때의 추위를 손돌이 추위라 부른다.

 

손돌 묘

 

손돌 묘

 

손돌 묘에서 본 길상산,정족산과 마니산의 모습

 

길상산,정족산,마니산의 모습

 

파수청터와 덕포진

 

덕포진 포대

 

덕포진에서 본 광성보 방향의 모습

 

덕포진의 모습

 

덕포진 포대

 

덕포진 포대와 길상산

 

덕포진 포대

 

덕포진 포대

 

덕포진 포대

 

덕포진 철쭉

 

덕포진 야외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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