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서울 영은문주초 (2020.09.08)
정의
1896년 독립협회가 서울의 독립문 일대에 조성한 공원.
내용
독립협회는 자주독립의 상징물로서 독립문의 건립과 함께 독립공원 건설을 당면의 목표로 하고 독립협회규칙 제2조에 이를 명기하고 있었다.
독립공원의 건설계획은 당시 빈터인 독립문과 전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한 독립관일대의 지역에 과수(果樹)·관상목·화초와 여러가지 관목을 심어 공원으로 꾸밈과 동시에 식물재배의 실험단지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또한 공원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용도에 따라 다르게 조성하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즉, 일부는 시민들의 운동을 위한 운동장으로 보존하고, 일부는 관리나 시민들의 산보 및 휴식을 위한 휴식처로 만들며, 또 다른 한부분은 시민들이 1주일에 1, 2회씩 시사문제에 관한 강연을 듣고 토론하는 장소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이 계획은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으므로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설하고 남은 기금이 부족하여 원래의 계획대로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경비지출항목 가운데 독립공원에 관한 화훼재식비(花卉栽植費)나 관리인력의 사용비용 등에 상당한 금액을 지불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로서는 큰 규모의 공원을 꾸몄다고 여겨진다. 독립공원은 독립문·독립관과 함께 대한제국시기 자주독립운동의 상징적 기념물이었다.
[獨立公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
서대문독립공원
서울 독립문
정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문(門). 석조문. 사적.
내용
높이 14.28m, 너비 11.48m 크기의 문으로, 자주민권과 자강운동의 기념물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려고 중국 사신을 영접하여 사대외교의 표상으로 인식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건립하였다. 곧 1896년(건양 1)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서 독립문 건립을 발의하였는데, 그 뒤 고종 황제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호응을 받아 1896년 11월 21일에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였다.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이 문의 건축 양식은 서재필의 구상에 따라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땄다. 다만 미적 배려가 부족하고 석재를 쌓는 수법도 이전의 성벽을 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재필의 자서전에 의하면, 설계는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하였고, 조선인 목수가 시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를 하고, 조선인 심의석(沈宜錫, 1854~1924)이 공사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은 화강석 쌓기로 건립하였는데, 가운데 부분에는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문 안쪽의 왼쪽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오얏꽃[李花] 문장이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앞뒤 현판석에는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쓴 글씨와 함께 그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 앞에는 이전의 흔적인 서울영은문주초 2개(사적 제33호)가 서 있다.
1917년에 수리공사를 하였고, 1928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받침 부분이 내려앉을 위험이 있다고 하여 공사비 4000원을 경성부에 위탁하여 크게 수리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벽체 안쪽에 새로운 재료로 강조한 철근콘크리트를 보강하였다.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겼다.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긴 가로·세로 각 70㎝ 크기의 기념동판을 묻었다. 이전공사는 1980년 1월에 마쳤다.
[─獨立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독립문
독립문
서울 영은문주초
정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조선전기 객관 정문에 세웠던 선돌. 주춧돌. 사적.
내용
사적 제33호.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영은문의 주춧돌이다. 모화관은 조선시대에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맞았던 객관(客館)으로, 1407년(태종 7)에 처음 건립되어 ‘모화루’로 불렸다. 그 뒤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으로 고쳐 불리고는 그 앞에 홍살문이 세워졌다. 1537년(중종 32)에 홍살문을 대신하여 보다 격식을 갖춘 영은문을 건립하였는데, 처음에는 문의 이름을 ‘영조(迎詔)’라고 불렀지만, 1606년(선조 39)에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의 주장에 따라 ‘영은’으로 바뀌었다. 다만 현재 전하는 서울의 고지도에는 ‘연주문(延柱門)’, ‘연은문(延恩門)’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그 뒤 1896년(건양 1)에 사대외교의 상징으로 거론되어 헐렸는데, 뒤쪽에 새로 독립문(獨立門)이 건립되면서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 1934년에는 남쪽으로 약간 옮겨 졌고, 1979년에는 성산대로와 금화터널을 개설하면서, 독립문과 함께 서북쪽으로 약 70m 정도 떨어진 곳에 옮겨 세웠다.
『중종실록』등의 문헌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는 2개의 기둥을 세운 1칸 규모의 문으로 건립하였는데, 지붕에는 푸른색 기와가 덮였다고 전한다. 철거되기 이전에 찍은 사진에도, 2기의 긴 주춧돌 위에 두리 기둥을 올리고, 기둥 머리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얹은 뒤 평방 위에 공포(栱包) 6구(具)를 결구하였으며, 공포 위에 겹처마의 우진각 지붕을 놓은 모습이다. 아울러 지붕의 용마루는 회를 높이 발랐는데, 그 양쪽 끝에는 취두(鷲頭)를 놓았으며, 우진각 지붕의 추녀마루에도 잡상을 얹었다. 또한 양쪽 기둥에는 꽃 무늬를 연이어 새긴 낙양을 달고서 그 가운데 부분에 편액(扁額)을 달았다.
현재 남아 있는 2기의 주춧돌은 2단의 받침돌 위에 긴 기둥이 올려져 있는 모습이다. 곧 네모난 아래바닥돌 위에 있는 네모난 윗받침돌에는 각 면마다 안상(眼象)이 2구씩 조각되어 있다. 그 위의 긴 기둥은 단면 4각의 각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은 모습이다.
[─迎恩門柱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서울 영은문주초
서울 영은문주초
독립공원에 있는 서재필선생동상
3.1 독립선언기념탑
독립관
3.1 독립선언기념탑
3.1 독립선언기념탑
독립선언문
서대문형무소의 모습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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