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지방문화재

임실 진구사지 (2022.05.02)

산을 오르다. 2022. 9. 1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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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진구사지 (2022.05.02)

 

 

 

 

 

 

 

- 임실 진구사(珍丘寺)는 『三國遺事』에 따르면 7세기 중반 고구려 보덕화상(普德和尙)의 제자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三國遺事』 卷三 興法 第三, 卷二十二 高句麗本紀 第十.】

- 보덕화상이 650년(고구려 보장왕 9)경에 반용사(般龍寺)에 머물다가 완산주(完山州) 고달산(高達山) 고달사로 옮겨가서 살았음을 고려할 때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 경에 진구사가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 후 진구사가 기록에 등장하는 경우는 893년 건립된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보물 제138호)에 중원에서 득도한 후 돌아온 사람 가운데 ‘珍丘休’라는 인물이 기록되어 있고【‘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홈페이지 제공)】

- 『동문선(東文選)』(1478년 편찬)에는 1312~1313년 진구사 주지인 대선사(大禪師) 혼기(混其)가 수원 만의사(萬義寺) 옛 터에 와서 사찰을 중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東文選』卷七十八 記】

- 또한 조선왕조실록 중 『태종실록(太宗實錄)』(태백산 사고본)에는 1407년(태종 7년)에 의정부에서 자복사(資福寺)를 지역의 명찰로 대신해 지정하면서 그 명단에 임실 진구사를 넣었음을 알 수 있다.【『太宗實錄』 14권】

- 그러나 조선시대 전기 『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해 조선후기에 이른 문헌들에는 진구사와 관련된 기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아 폐사(廢寺)와 관련된 연혁을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 다만, 구전으로 섬진강의 범람과 임진왜란 때 소실로 인한 폐사가 전해지고 있다.

[문화재청자료 인용]

 

 

 

 

진구사지

 

보물 제267호 임실 진구사지 석등

 

보물 제267호 임실 진구사지 석등

 

보물 제267호 임실 진구사지 석등

 

보물 제267호 임실 진구사지 석등

 

보물 제267호 임실 진구사지 석등

 

보물 제267호 임실 진구사지 석등

 

보물 제267호 임실 진구사지 석등

 

보물 제267호 임실 진구사지 석등

 

보물 제267호 임실 진구사지 석등

 

보물 제267호 임실 진구사지 석등

 

보물 제267호 임실 진구사지 석등

 

임실 진구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임실 진구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임실 진구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임실 진구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석탑

 

석탑

 

진구사지

 

진구사지

 

진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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