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절,암자

서울 인왕산 인왕사,인왕산 국사당,인왕산 선바위 (2020.09.08)

산을 오르다. 2022. 7. 24.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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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왕산 인왕사,인왕산 국사당,인왕산 선바위 (2020.09.08)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인왕산()에 있는 사찰.

역사적 변천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경복궁을 수호하는 호국도량()으로서 인왕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일제강점기인 1912년 박선묵이 선암정사(, 현 본원정사)를 세우면서 이 절을 중창하였다. 1914년에 탄옹이 인근에 대원암()을 세웠고, 1924년에는 자인이 안일암()을 지었다. 이어 1927년에는 춘담이 극락전을 세우고 1930년에는 묘법이 치성당을 신축하는 등 1930년경에 이르면 10여 개의 암자가 모이며 군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1942년에 분리된 여러 개의 암자를 통합하여 다시 ‘인왕사’라 칭하고 봉은사()의 말사로 등록하였다.

내용

현재 5개 종단의 11개 사암이 ‘인왕사’라는 한 명칭의 사찰 아래서 공존하고 있다. 각 암자마다 종단이 다르고 주지가 따로 있지만, 4년에 한 번씩 대표역할을 하는 총주지를 선출하여 절을 운영하고 있다. 인왕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본원정사()는 대웅전과 요사, 유물관인 심우장() 등의 건물과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주요 법회와 각종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초에 호국도량으로 창건된 단일 사찰이었지만, 근대기에 들어와 여러 개의 암자가 군락을 이루며 ‘인왕사’라는 하나의 사찰로 공존해 오고 있다.

[仁旺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

 

 

 

인왕사 일주문

 

인왕사 종무소

 

인왕사 대웅전

 

[인왕산 국사당]

정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인왕산(仁王山)에 있는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여러신을 모신 신당. 국가민속문화재. 내용 국가민속문화재 제28호. 1동(棟).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현재 인왕산 기슭의 선바위 밑에 위치하고 있으나, 원래는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 따라서 그 연혁은 남산과 관련된 신앙의 역사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태조 5년 12월) 호국의 신으로 삼아(태종 4년 9월)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태종 8년 5월, 9년 7월)고 하며, 아울러 신주(神主)가 있었음도 언급하고 있다(태종 12년, 2월).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에 의하면, 목멱신사라는 명칭의 사당이 남산 꼭대기에 있었고, 매년 봄·가을에 초제[醮祭: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그러나 국사당이라는 명칭과 무신도(巫神圖)에 대한 언급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서 비로소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현재 국사당의 전신이다. 1972년 당시 당 관리인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시대 말엽에는 이미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일이 없었고, 다만 별궁(別宮)의 나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오거나 또는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치성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먼저 이 당을 거쳐가고는 하였다고 한다. 민중전(閔中殿)이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리게 하였다는 사실은, 궁중 발기[撥記:다스리는 기록]의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궁중 발기에는 인근 각처의 명산과 당·묘 등에 치성을 위하여 보낸 금품목록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 국사당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한다. 국사당은 1925년남산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신도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전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그곳이 태조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국사당이라는 명칭도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현재 당의 평면은 전면 3칸에 측면 2칸의 주간(柱間)이고, 기둥 간 사이는 전면 어간(御間) 약 2.6m에 협간(夾間)과 측간(側間)은 모두 2.4m이다. 따라서 내부의 넓이는 도합 11평이고,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동서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마루 좌우 일부와 뒷면 및 전면에는 무신도가 걸려 있고, 평면 전체가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민간의 일반건물들보다 단순한 구조이지만 규모는 더 큰 편이며, 기둥 위의 구조나 지붕형태 등 전체적인 구성이 견실과 간소를 위주로 하면서도 방주[方柱: 네모진 기둥]의 실귀[糸刻: 가늘게 귀접이한 재목]나 분합문의 긴 형태, 문살의 새김 등과 같은 드러나지 않는 세밀한 부분에서는 최소한도의 세련된 장식요소가 가해져서 우아한 면도 엿보인다. 아울러 대들보의 후림이나 연목의 배흘림, 규격 설정 등에서 경공[京工: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엿볼 수 있어서, 영조·정조 이래의 견실과 간결을 위주로 한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된다. 국사당은 굿만 하는 곳이 아니라 단골신도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참배객들이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연중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데, 정월에 가장 많고 그 다음이 2월·3월·9월의 순이다. 이 당에서 행하는 굿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이고, 둘째는 병(病)굿 또는 우환굿, 그리고 셋째는 흔히 부모의 사령(死靈)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진오기굿이다. 그러나 몇 가지 동기가 복합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굿이 1년에 평균 100여 회 치러진다. 서울시내에도 이러한 굿당이 몇 군데 있는데, 최근 10∼20년 사이에 남산 밑 회현동의 노인성당과 불광동의 할미당, 자하문의 서낭당 등이 없어졌지만, 국사당은 1973년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仁旺山國師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인왕산 국사당

 

[인왕산 선바위]

정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인왕산(仁王山)에 있는 신앙의 대상으로 신성시 된 바위. 선돌. 시도민속문화재.

내용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 형상이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아서 ‘禪(선)’자를 따서 선바위[禪巖]라 불렀다고도 한다. 또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 또는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도 있다.

이것은 인간이 죽어서 석불(石佛)이 되었다는 인간의 화신으로 설화되고 있으며, 여기에 빌면 소원성취할 수 있다고 하여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특히, 자식 없는 사람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정성을 드리는데,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더욱 크다고 하여 작은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붙임’이라 하며, 이러한 바위를 ‘붙임바위’라고도 한다.

일제가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선바위 곁으로 옮기게 한 뒤로 더욱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신앙과 밀착되게 되었다. 국사당은 무신당으로서 굿을 행하는 곳이니 바로 옆에 있는 선바위와 복합적으로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선바위는 전국적으로 보이는 암석숭배의 일종이었겠으나 이것이 전설화되고 무속신앙과 밀착되면서 무속신앙의 주요지가 된 듯하다.

[인왕산禪바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인왕산 선바위

 

인왕산 선바위

 

인왕산 선바위

 

인왕산 선바위

 

멀리서 본 인왕선 선바위와 서울 남산의 모습

 

인왕산 선바위와 서울시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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